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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천민 출신으로 사대부들과 교류, 명기 매창이 사랑한 남자

  • 등록일 2022-02-09
  • 작성자 관리자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18) 조선중기 문화 사랑방 이끈 시인, 유희경
신병주 교수
2021 서울사진공모전 수상작(사진은 칼럼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2021 서울사진공모전 수상작(사진은 칼럼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선조에서 인조 대에 이르는 조선중기에는 영의정을 지낸 이원익을 비롯해 장유, 김상헌, 이수광, 신흠 등 당대의 손꼽히는 학자와 관료들이 찾아와 시를 나누고 풍류를 즐겼던 공간이 있었다. 창덕궁 서쪽 계곡에 위치한 ‘침류대(枕流臺)’가 그곳으로서, 침류대의 주인은 천민 출신 시인 유희경(劉希慶:1545~1636)이었다. 유희경은 이곳에서 시 쓰기를 즐겼는데, 임진왜란 이후 이곳에는 내로라하는 문인들과 고위 관료들이 드나들면서 문화 사랑방 역할을 했다. 

1. 창덕궁 서쪽에 위치한 문화공간, 침류대

 『지봉유설』의 작자 이수광은 침류대에 관해 언급하면서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고 했다. “넓은 바위 주위에는 복숭아나무 여러 그루가 둘러있고 시냇물 양쪽으로는 꽃비가 흩뿌리니 비단물결이 춤추는 것 같다. 옛날의 무릉도원이 이보다 더 좋지는 못했을 것이다.”(이수광, 「침류대기」)고 표현하였다. 

침류대의 위치에 대해서는 유희경의 문집인 『촌은집(村隱集)』 ‘행록’에 “집은 정업원(淨業院) 아래쪽의 하류, 속칭 원동(院洞)이라고 하는 곳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정업원이 현재의 창덕궁 서편 원동 부근에 있었음을 고려하면 침류대 역시 이 주변에 위치했음을 알 수가 있다. 침류대의 위치를 추정하는데 또 하나의 단서가 되는 것은 이수광의 기록이다. 그가 쓴 「침류대기」에는 ‘내(유희경)가 거처하는 곳은 금천의 상류’라고 했다. 금천교를 따라 상류로 올라간 곳에 침류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기록이다. 금천교는 창덕궁 입구 쪽에 위치한 다리로서, 금천의 물줄기를 따라 올라오면 침류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두 기록을 종합하면 침류대는 정업원의 아래쪽 계곡에 있었다.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 물길은 금천교와 만난다. 이곳에서 다시 상류 쪽으로 백여 보를 올라간 지점이 침류대의 위치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침류대는 현재의 창덕궁 안에 위치하는 모순이 생긴다. 그 까닭은 효종 때의 궁궐 확장 공사 때문이다. 효종 때 왕대비인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를 위한 만수전(萬壽展)을 지으면서 침류대는 이원익의 집과 함께 궁궐 안으로 편입됐다고 한다. 창덕궁의 돌담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는데, 창덕궁 서편 담장에는 ‘ㄱ’자로 꺾인 확장 흔적이 있다. 유희경이 침류대의 주인을 자처하던 시절의 침류대는 현재의 창덕궁 서편, 담장 안쪽에 있었고, 궁궐의 경계는 지금과 달리 금천 동쪽에 있었을 것이다.

당시의 침류대는 조선 상류사회에서 널리 알려진 곳이었는데, 인목대비가 궁궐 너머로 침류대를 거니는 유희경을 보았다는 기록이 전해지기도 한다. 침류대가 있던 곳은 계곡이 깊어 맑은 물이 흘러내리고 경치가 좋은 곳이었다. 침류대는 당시의 명사들이 모여 학문을 논하고 교우 관계도 갖기도 하던, 17세기 조선의 문화 사랑방 역할을 했다고 볼 수가 있다. 침류대를 드나들던 문인들은 이곳을 무릉도원으로 표현하며, 그 아름다움을 시로 남겼는데, 임숙영은 “도원 속으로 걸어 들어가니/봄바람 속에 꽃도 많은 것이/친한 친구 술 권하는데/석양이 기우는 줄 몰랐소”라고 표현하고 있다.

2. 유희경은 누구인가?

유희경은 천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정치가이자 사대부들과 친분을 맺고 시를 나누었다. 천민 유희경이 사대부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상장례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유희경의 문집인 『촌은집』에 따르면 유희경은 열세 살 되던 해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린 유희경은 혼자 3년 상을 치렀는데, 이것이 당대 이름난 학자이자 서경덕의 문인인 남언경(南彦經)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다. 

남언경에게 정통 예법을 배운 유희경은 당대 손꼽히는 상장례(喪葬禮) 전문가로 성장하게 된다. 오래지 않아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고, 양반 사대부들은 초상은 물론이고, 국상(國喪) 때도 그에게 자문했다고 한다. 당시 항간에는 유희경의 명성을 짐작할 수 있는 소문이 떠돌았다. 허준의 스승이었던 어의(御醫) 양예수는 뒷문으로 나가고 유희경은 앞문으로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이 말은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의사인 양예수는 뒷문으로 나가고 유희경은 장례를 치르기 위해 대접을 받으며 앞문으로 들어온다는 뜻이다. 

유희경은 부안 기생 매창(梅窓:1573~1610)이 사랑한 남자이기도 했다. 현대의 시인 신석정은 ‘개성에 송도 3절(松都三絶)이 있듯이 부안에도 부안삼절(扶安三絶)이 있다’ 고 했다. 박연폭포와 황진이, 서경덕이 송도삼절이라면 부안의 명물인 직소폭포, 그리고 매창과 유희경을 일컬어 부안 3절이라 한 것이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591년 봄날의 일이었다. 남도를 여행하던 유희경이 그녀를 찾아온 것이다. 이때 매창은 ‘유, 백’ 중 누구냐고 묻는데, 유, 백이란 당시 천민 시인으로 유명했던 유희경과 백대붕(白大鵬)을 뜻한다. 매창은 유희경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남쪽 지방 계랑의 이름을 일찍이 들었는데/시와 노래 솜씨가 서울에까지 울리더군/오늘 그 진면목을 보고 나니/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듯하구나.(유희경, 『촌은집』, 권1, 「증계랑(贈癸娘)」)

이 시에서도 나타나듯이, 매창은 시를 짓고 노래하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지방 기생의 재주가 서울까지 알려질 정도였으니, 매창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되고도 남는다. 

유희경은 부안으로 내려와 직접 매창을 보고 나서, 떠도는 소문만이 아님을 알았다. 그는 매창의 매력에 흠뻑 빠져, 마치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다고 표현했다. 시에 능통했던 유희경과 매창. 둘은 서로를 사랑하는 감정을 시를 통해 주고받았다. 유희경의 문집에 실려 있는 시들 중에 매창을 생각하며 지은 시는 7편으로 확인된다. 유희경은 28세라는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매창을 연인처럼 사랑했던 듯하다. 매창과 유희경이 서로에게 강하게 끌린 것은 천민과 기생이라는 신분의 한계에 대한 공감대도 컸다. 여기에 더하여 문학이라는 공통의 언어가 있었기에 두 사람의 운명적 교유가 가능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3. 위항문학운동의 선구자, 유희경

유희경이 천민의 신분을 벗어난 것은 임진왜란의 의병 활동을 인정받아서였다. 이후에 많은 학자들이 침류대를 찾으면서 유희경과 친분을 맺었다. 양반이 된 후에도 유희경은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바로 이 때문에 많은 사대부들이 그의 집을 찾아와 함께 즐기기를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침류대를 드나들던 사대부의 면면을 살펴보면 차천로, 이수광, 신흠, 임숙영, 조우인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학자이자 관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젊은 시절 유희경과 친하게 지낸 시인으로는 백대붕(白大鵬, ?~1592)이 있었다. 백대붕은 배를 만들고 수리하는 전함사(典艦司)의 노비로, 그 역시 한문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유희경은 백대붕과 더불어 시작을 즐겼는데, 두 사람의 명성은 양반들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진 것이었다. 사대부들은 두 사람을 가리켜 ‘풍월향도(風月香徒)’라고 일컬었다. 풍월향도는 임진왜란 전에 백대붕과 유희경을 중심으로 천민들과 평민들이 모여서 만든 문학 모임이다. 풍월향도는 임진왜란 이전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전쟁 중에 백대붕이 사망하고 유희경의 신분이 상승한 후에, 서민 출신들의 시 모임인 풍월향도는 ‘삼청시사(三淸詩社)’로 그 전통이 이어졌다. 삼청시사는 주로 삼청동에 모여 활동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유희경의 제자 최기남을 중심으로 아전, 서리, 역관 등 중인 이하 신분들이 모여 시와 문장을 지으며 자신들의 문학 세계를 만들어갔다. 이들은 서로 주고받은 시를 모아서 1658년 『육가잡영(六歌雜詠)』이란 시집을 냈다. 육가잡영은 위항문학 최초의 시집이다. 

위항(委巷)이란 대저택이 있는 부촌이 아니라 꼬불꼬불 길이 나 있는 달동네를 뜻하는 것으로, 위항문학은 중인 이하 계층 사람들의 문학을 일컫는 말이다. 풍월향도에서 시작된 위항문학인들의 모임은 인왕산을 중심으로 점차 확대되었다. 인왕산이 그 중심지가 된 까닭은 양반들이 많이 살던 안국동이나 종로 등의 중심가와 가까우면서도 비교적 땅값이 싸고 경치가 좋았기 때문이다.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것은 옥계시사(玉溪詩社)와 천수경이 중심이 된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로서, 이들 시사는 조선후기 위항문학 운동의 중심을 이루게 된다. 조선후기 위항문학의 선구적 인물 유희경. 현재의 창덕궁 옆 침류대는 그의 문학적 재능이 태동하고, 17세기를 대표하는 조선의 문인, 관료들이 어우러져 자신의 실력을 한껏 발휘하던 문화 공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