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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조선의 두 왕비와 인연 있는 '감고당길' 걸어볼까!

  • 등록일 2022-05-18
  • 작성자 관리자
오른쪽 덕성여고와 왼쪽 덕성여중 사이로 난 서정미 물씬 나는 감고당길
오른쪽 덕성여고와 왼쪽 덕성여중 사이로 난 서정미 물씬 나는 감고당길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24) 인현왕후와 감고당


역사와 문화 공간이 많이 남아 있어 사람들이 자주 찾는 서울 북촌. 인사동 쪽에서 서울공예박술관(옛 풍문여고 자리)을 거쳐 정독도서관 쪽으로 가는 길에는 ‘감고당길’이라는 표지석이 보인다. 


감고당(感古堂)은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의 사저로, 현재 이곳에는 덕성여고 건물이 들어서 있다. 감고당이라는 이름은 영조가 붙인 것으로, 이곳에 인현왕후의 거처가 있었음을 회고하며 그 감회를 당호로 정한 것이다.

인현왕후, 숙종의 계비가 되다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1667~1701)는 여흥 민씨 민유중(閔維重)과 은진 송씨 송준길(宋浚吉)의 딸인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1667년(현종 8)에 태어났다. 한양의 서부 반송방(盤松坊)에서 태어났다. 반송방의 이름은 서대문 밖 천연동 서지(西池)에 반송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던 것에서 유래하는데, 현재의 서대문구 충정로 일대와 현저동, 중림동 등이 반송방에 포함된다.


민유중은 송시열과 함께 서인에서 노론으로 이어지는 정치 세력의 핵심이었고, 왕비의 외할아버지 송준길은 송시열과 함께 양송(兩宋)으로 불리며, 서인, 노론의 대표적인 학자, 정치가로 활약하였다. 


인현왕후가 숙종의 계비가 된 데에는 가문의 후광과 함께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의 갑작스러운 승하가 있었다. 인경왕후(仁敬王后:1661~1680)는 1670년 10세의 나이로 세자빈으로 간택된 후, 1674년 숙종이 왕이 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왕비로 산 생애는 그리 길지 않았다. 당시 조선에 유행한 천연두 때문이었다. 인경왕후는 1680년 10월 26일 천연두에 걸린 지 8일 만에 경덕궁 회상전에서 20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대개 왕비가 승하하면 3년상을 지낸 후에 혼인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왕비의 자리를 잠시라도 비워둘 수 없다는 대비 명성왕후(현종의 왕비, 숙종의 어머니)의 하교로 계비 간택에 들어갔다. 


1681년 삼간택에서 뽑힌 인현왕후는 어의동 별궁에 들어가 왕비 수업을 받았으며, 1681년 5월 2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왕비로 책봉되었다. 오늘날 혼례식에 행사하는 친영(親迎) 의식은 5월 13일에 거행되었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창덕궁으로 모셔온 후에 함께 술과 음식을 나누는 잔치 의식은 동뇌연(同牢宴)을 거행하였다. 혼례식을 경축하여 “14일 새벽 이전부터 잡범(雜犯)의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용서할 것”을 지시하였다. 요즈음으로 보면 사면령을 내린 것이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혼례식 과정은 『숙종인현왕후 가례도감의궤』로 정리되어 있다.


숙종인현왕후 가례도감의궤
숙종인현왕후 가례도감의궤

장희빈의 등장과 인현왕후의 폐위

명문가 출신으로 숙종의 계비가 되었지만, 인현왕후의 왕비 생활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가장 큰 이유는 왕자를 출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20대 후반이 되도록 후사가 없어 초조해 하던 숙종의 고민이 마침내 해결되었다. 

후궁으로 들어온 장희빈이 1688년 마침내 아들을 출산한 것이다. 장희빈은 처음 궁녀로 들어왔으나, 그녀의 행실을 미리 간파한 대비 명성왕후에 의해 쫓겨났다. 인현왕후는 숙종이 장희빈을 총애한다면서 그대로 궁궐에 둘 것을 청했지만 대비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당시의 『숙종실록』 기록을 보자. “장씨는 곧 장현의 종질녀(從姪女)이다. 나인(內人)으로 뽑혀 궁중에 들어왔는데 자못 얼굴이 아름다왔다. 1680년 인경왕후가 승하한 후 비로소 은총을 받았다. 명성왕후 곧 명(命)을 내려 그 집으로 쫓아내었다. ... 1681년 인현왕후가 중전이 되자 그 일을 듣고서 조용히 명성왕후에 아뢰기를, ‘임금의 은총을 입은 궁인(宮人)이 오랫동안 민간에 머물러 있는 것은 사체(事體)가 지극히 미안하니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명성왕후가 말하기를, ‘내전(內殿:왕비)이 그 사람을 아직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오. 그 사람이 매우 간사하고 악독하고, 주상이 평일에도 희로(喜怒)의 감정이 느닷없이 일어나시는데, 만약 꾐을 받게 되면 국가의 화가 됨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니, 내전은 후일에도 마땅히 나의 말을 생각해야 할 것이오.’ 하였다.” 인현왕후는 ‘어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헤아려 국가의 사체(事體)를 돌아보지 않으십니까?’라면서 장희빈을 변호해 주었지만, 명성왕후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1683년 명성왕후가 갑자기 승하하였고, 이것은 장희빈에게 엄청난 기회가 되었다. 1686년 12월 10일 숙종은 장희빈을 다시 궁궐로 불러 숙원(淑媛)으로 삼았다. 정식 후궁이 된 데 이어, 1688년에는 숙종이 그토록 고대하던 왕자 윤(햇빛 윤:후의 경종)를 낳으면서 장희빈의 위상은 더욱 커졌다. 숙종은 균을 원자로 책봉하려 했다. 원자는 세자로 가는 전 단계로서, 장희빈의 아들이 원자로 책봉되면, 인현왕후는 허울뿐인 왕비로 전락할 터였다. 인현왕후의 지원 세력인 서인들은 왕비의 나이가 이제 22세라서 출산의 가능성이 충분하다면서, 장희빈 아들을 원자로 삼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나 숙종은 원자 정호를 관철시켰고, 반대하는 서인 세력에 대한 강한 탄압에 나섰다. 송시열은 제주도에 유배된 후, 서울 압송 중 정읍에서 숙종이 내린 사약을 받고 사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국은 완전히 바뀌었다. 서인들은 대거 숙청되었고, 장희빈을 지지한 남인 세력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1689년(숙종15)에 단행된 이 사건을 1689년이 기사년이고 정치적 국면이 바뀌었다고 하여,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 칭한다. 기사환국 이후 장희빈이 왕비의 자리에 오르면서, 인현왕후는 폐위된 후 서인(庶人)의 신분으로 전락했다.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난 그녀가 옮긴 거처는 사가가 있는 안국동이었다.
감고당과 인현왕후, 명성황후의 인연

인현왕후는 폐위된 후 사가인 안국동으로 들어갔다. 훗날 이 집에 이름을 붙인 이는 영조였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인현왕후의 시중을 들던 궁녀 출신이었으니, 인현왕후와 영조 모자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진 셈이다. 1761년(영조 37) 인현왕후의 사가를 찾은 영조는 인현왕후가 머물던 침실을 ‘보면, 옛일을 느껴본다(感古)’는 뜻에서 감고당이라 이름하고 어필로 그 편액을 써서 걸도록 했다. 영조는 “내가 태어난 것이 마침 갑술년이었는데, 바로 왕비께서 복위되던 해”였다며 인현왕후와의 인연을 강조했다. 

1799년 8월 14일 정조는 인현왕후의 기일을 기억하며, “오늘은 곧 인현 성모(仁顯聖母)께서 돌아가신 날이다. 회상하면 지난날 선대왕이 안동(安洞)의 옛집에 거둥하셨을 때 내가 함께 모시고 성모께서 잠깐 거처하신 곳을 삼가 우러러본 적이 있는데, 임금이 쓰신 감고당 세 글자가 난간 위에 걸려 있어 탄생의 사적을 기록한 추모동(追慕洞)의 비석과 민간의 마을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고 하여 감고당이 당시에 성지(聖地)처럼 인식되었음을 회고하고 있다.

인현왕후의 감고당 생활은 5년 만에 막을 내렸다. 1694년 숙종이 장희빈을 후원하던 남인을 숙청하고 서인을 정계에 복귀시키는 갑술환국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그해 4월 12일, 숙종은 왕비로 있던 장희빈을 다시 희빈으로 강등시키고, 장씨에게 내려준 왕비의 옥보(玉寶)를 부수게 했다. 6월 1일에는 인현왕후를 다시 왕비로 책봉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1681년 처음 왕비로 간택된 이후 두 번째로 경험한 왕비 책봉이었다. 

인현왕후를 복위시킨 후 숙종은 향후에 후궁 출신이 절대 왕비가 될 수 없도록 하는 조처를 내렸다. 요즈음으로 보면 ‘장희빈 법’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 조처 이후 장희빈 이후 후궁 출신 왕비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감고당은 인현왕후 다음으로 여흥 민씨 출신으로 고종의 왕비가 되는 명성황후와도 그 인연을 이어간다. 1851년 경기도 여주에서 출생한 명성황후는 부친 민치록이 사망하자 8세 때 한양으로 왔다. 한양에서 그녀가 머문 곳은 감고당으로, 인현왕후와 집안 간 깊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명성황후의 부친 민치록은 여주에 조성된 인현왕후의 부친 민유중의 묘를 지키던 관리인이었기 때문에, 가문의 배려로 명성황후도 이곳에 머물게 된 것으로 보인다. 

명성황후는 1866년 고종의 왕비로 간택되기 전까지 어머니 한산 이씨와 감고당에서 계속 거주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사저인 운현궁과 감고당이 거리가 가까워 직접 왕비 후보를 볼 수 있었던 것도 간택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감고당'이라는 건물이 있었던 데서 붙여진 '감고당길', 서울공예박물관부터 정독도서관까지 440m에 이른다
'감고당'이라는 건물이 있었던 데서 붙여진 '감고당길', 서울공예박물관부터 정독도서관까지 440m에 이른다

현재 감고당 자리에는 덕성여고 건물이 있다. 덕성여고와 덕성여중 사이의 골목길을 포함하여 서울공예박물관에서 정독도서관 쪽으로 가는 길을 ‘감고당길’이라 부르는 것에는 이러한 역사가 담겨 있다. 인현왕후, 명성황후 두 왕비가 감고당을 나와 길을 걸었던 상황을 떠올려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감고당 건물은 한때 도봉구 쌍문동 덕성여자대학교 학원장 공관으로 이전되었다가, 2006년에 명성황후 생가 근처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경기도 여주시에서 명성황후 관련 유적지를 본격적으로 조성하는 사업을 진행하면서, 이곳으로 감고당 건물을 옮겨 놓은 것이다. 감고당 사랑채에는 인현왕후와 명성황후가 이곳에 거처했음을 기억하는 주련(柱聯)이 붙어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