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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부터 이어진 '청와대' 900년史 들여다보기

  • 등록일 2022-06-02
  • 작성자 관리자
청와대 전경
청와대 전경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25) 청와대의 역사

고려의 남경

현재의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경으로 불렸다. 고려는 고대 삼국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수도인 개경(開京) 이외에 고구려와 신라의 수도였던 평양과 경주를 각각 서경(西京)과 동경(東京)으로 삼았다. 고려 문종(文宗:1019~1083, 재위 1046~1083) 때인 1067년(문종 21)에 양주(楊州)를 남경으로 승격시키고, 주변의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는 조처를 하였다. 

당시 남경은 백제의 고도이자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풍수지리설에서 최고의 명당 가운데 하나로 꼽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1068년(문종 22) 문종은 남경에 새로운 궁궐을 창건하였는데, 수도인 개경과 더불어 경기와 그 주변 지역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한 성격도 있었다.

문종에 이어 남경의 위상을 높인 고려 왕은 숙종(肅宗:1054~1105, 재위 1095~1105)이다. 숙종은 아예 남경을 수도로 삼을 생각까지 했다. 남경 천도 논의는 1095년(숙종 1)에 김위제와 같은 술사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제기가 되었다. 김위제는 도선(道詵)의 비기설을 근거로 남경의 건립과 함께 나아가 남경으로의 천도를 건의했다. 

1099년(숙종 4) 9월 숙종은 친히 남경에 행차하여 일대를 둘러보고, 최사추(崔思諏)와 윤관(尹瓘) 등으로 하여금 공사를 감독하게 했다. 1101년(숙종 6)에는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을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남경 건설을 진행했는데, 이때 조성되었던 궁궐이 바로 현재의 청와대 터에 있었다. 남경의 궁궐 공사는 1104년(숙종 9) 5월 완성되었고, 8월 숙종은 이곳에 행차하여 연흥전(延興殿)에서 백관의 조하를 받았음이 『고려사』의 기록에 보인다. 그러나 숙종 대에도 천도는 단행되지 않았다. 개경 세력이 여전히 강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숙종 승하 후 즉위한 예종(睿宗)과 인종(仁宗)도 수시로 남경에 행차하였다. 연흥전에서 군신의 조회를 받으며 연회와 불사(佛事)를 진행하면서 남경의 위상을 높였다. 그러나 1128년(인종 6)에 남경의 궁궐에 화재가 있고, 이듬해 서경에 대화궁을 크게 지으면서, 남경의 면모는 이전과 같지 못하게 되었다. 

특히 의종(毅宗) 대인 1170년 무신정권이 수립되고, 13세기 초부터 시작된 몽골의 침략으로 인하여 남경의 도시 기능은 점차 소멸되었다. 몽골 간섭 시기에는 지방행정 단위로서의 ‘경(京)’은 천자국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단위라 하여 1308년(충렬왕 34) 한양부(漢陽府)로 개편되었다. 특히 이 시기 천도라는 사안은 몽골 황제의 허락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남경 천도론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조선시대의 청와대 영역

현재의 청와대 지역이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1392년 조선이 건국되고, 2년 후인 1394년 10월 한양 천도가 단행되면서다. 1395년 9월에는 백악(白岳)을 주산(主山)으로 하는 법궁 경복궁이 완성되었다. 경복궁은 현재의 청와대 터에서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간 평지에 조성되었고, 청와대 자리는 왕실의 휴식 공간인 후원으로 활용되었다. 후원에는 각종 정자가 조성되었고, 과거 시험이 이곳에서 실시되기도 했다. 역대의 공신들이 모두 모여 회맹(會盟) 의식을 행한 북단(北壇)도 이곳에 위치했다. 1456년(세조 2) 11월 14일 『세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왕세자가 개국 공신, 정사 공신, 좌명 공신의 친자(親子)와 적장자손(嫡長子孫), 정난 공신, 좌익 공신 및 친자 등과 더불어 북단에서 함께 맹세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역대의 공신들이 북단에서 회맹하는 의식은 세조 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중종은 1507년 9월 25일 축시(丑時)에 상이 모든 공신과 백관을 거느리고 북단에서 회맹제(會盟祭)를 거행하고 삽혈 의식을 행하였음이 『중종실록』의 기록에 보인다. 네모난 형태의 북단은 회맹단 또는 맹단으로도 불렸다. 영조 대인 1770년쯤에 제작된 「한양도성도(漢陽都城圖)」에는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의 북쪽, 정빈 이씨(영조이 장자인 효장세자 생모)의 사당인 연호궁(延祜宮)의 동쪽에 회맹단이 표시되어 있다. 영조 대의 화가 정선이 그린 ‘북단송음(北壇松陰)’에도 소나무가 무성한 사이에 사각형의 회맹단의 모습이 보인다.

1592년의 임진왜란으로 경북궁과 후원 영역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270년간 궁궐의 기능을 갖지 못했던 경복궁이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1865년(고종 2)이었다.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중건 사업으로 경복궁은 다시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경복궁 중건과 함께 후원 영역도 대거 정비되었다. 고종은 현재의 청와대 영역을 북원(北苑)이라 하고, 이곳에 중일각(中日閣), 오운각(五雲閣), 융문당(隆文堂), 융무당(隆武堂), 춘안당(春安堂), 경무대(景武臺) 등의 건물을 세웠다. 

경무대는 경복궁의 ‘경’과 신무문의 ‘무’에서 그 글자를 취한 것으로, 경복궁의 북쪽에 있는 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북원에서는 주로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으며, 경무대와 중일각 등은 과거 시험을 치루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이번에 친제(親祭) 때 반열에 참가했던 선파(璿派) 유생들과 무사들은 7일 경무대의 친림 응제(親臨應製)에서 시험을 쳐서 뽑을 것이다. 무사들은 중일각에서 병조판서가 활쏘기 시험을 주관하라.”는 『고종실록』의 기록에서 이러한 상황들을 알 수가 있다. 경복궁은 1896년 2월 고종이 이곳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면서, 법궁으로서의 위상을 잃었고 현재의 청와대 영역인 후원 역시 제대로 활용이 되지 못하였다.
지난 5월 10일에 개방된 청와대 모습
지난 5월 10일에 개방된 청와대 모습

조선총독부 관저에서 역대 대통령의 공간으로

1910년 8월 29일 일제에 의한 강제 병합 이후 경복궁과 후원 영역은 조선총독부의 차지가 되었다. 일제는 남산 왜성대(倭城臺)의 총독부 청사가 협소하다는 이유로 신축 장소를 물색했고, 새 총독부가 들어설 자리로 경복궁 부지를 결정했다. 1926년 10월 조선총독부 청사가 경복궁 자리에 들어섰고, 1939년 7월에는 경무대 자리에 총독 관저를 세웠다. 

1945년 8월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가 거주하였고,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이후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집무실로 사용하였다. 명칭은 고종 대 후원 지역에 세웠던 경무대의 이름을 다시 사용하였다. 1961년 4·19 혁명으로 집권한 윤보선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과 차별화하여 경무대의 이름을 ‘청와대’로 고쳤다. 미국의 대통령 집무실이 백악관(白堊館)이라는 점과 경무대의 지붕이 청기와인 것에 착안한 명칭이었다. 이후 청와대는 역대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이 되다가, 1990년 노태우 대통령 재임 시절 청와대 본관 건물의 신축을 결정하면서, 그 역사를 일단 마감하게 된다.
'청와대 구 본관(경무대) 터’ 표석이 있는 수궁터
'청와대 구 본관(경무대) 터’ 표석이 있는 수궁터

1990년 2월 20일 신축공사장 뒤 바위에서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는 표석이 발견되어 이곳이 예로부터 명당임을 증명하기도 했다. 청와대 본관 건물, 즉 대통령 관저는 1990년 10월 25일에 완공했다. 본관 신축 이후인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은 옛 조선총독부관저에서 시작한 옛 청와대 건물의 철거를 지시하였다. 현재 옛 지형대로 복원된 이곳은 원래 이곳에 있던 건물의 명칭을 따서 ‘수궁(守宮) 터’라 부른다. 1995년 8월 15일 해방 50주년을 맞이하여 김영삼 대통령은 경복궁을 가리고 있던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까지 철거하도록 하였다. 당시 총독부 건물 철거 장면은 TV 방송으로 생중계가 되어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경무대 시기까지 포함하면 1948년부터 2022년 5월 9일까지 74년 동안 청와대는 대통령 집무실로 역사적 기능을 한 공간이었다. 고려와 조선의 왕이 거처하는 궁궐을 거쳐 가장 가까운 시기까지 최고 집권자가 영욕의 시간을 보낸 곳 청와대. 이제 청와대는 지금 우리의 시대에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