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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읽다보면 생생하게 그려지는 280년 전 한양의 풍경

  • 등록일 2022-12-07
  • 작성자 관리자

정조는 신하들에게 ‘성시전도’를 시제로 글을 올리게 했다.

정조는 신하들에게 ‘성시전도’를 시제로 글을 올리게 했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36) 정조와 ‘성시전도시’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학자 군주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는 풍류를 즐긴 왕이기도 했다. 1792년(정조16) 4월, 정조는 한양의 모습을 그린 그림인 ‘성시전도(城市全圖)’를 시제로 하여 신하들에게 글을 올리게 했다.


정조의 명을 받고 신하들이 지어 올린 시 중 현재까지 13종이 전해오고 있다. 신광하, 박제가, 이만수, 이덕무, 유득공, 이집두, 정동간, 서유구, 이희갑, 김희순 등 모두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었다. 이들 시를 통해 당시 명승, 시장, 풍물 등 한양의 역동적인 모습을 생생히 볼 수가 있다. 


1. 정조, 한양의 모습을 시로 올리게 하다.


규장각의 이문원에 있는 관원이 매일 규장각에서 있었던 일과 업무에 대해 기록한 『내각일력』의 1792년(정조 16) 4월 24일의 기사에는 정조가 당시 ‘성시전도’를 시제로 시를 짓도록 명하고 3일간의 기한을 준 내용이 기록이 되어 있다.


또한 당시 시를 지어 올린 이덕무(李德懋 : 1741~1793)의 문집인 『청장관전서』권 20, 「아정유고」의 ‘응지각체’ 항목 아래에 기록한, 성시전도 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임자년(1792년) 4월에 궁궐에 근무하는 여러 신하에게 명하여 지어 바치게 했는데, 병조 좌랑 신광하(申光河), 검서관 박제가(朴齊家), 검교직각 이만수(李晩秀), 우부승지 윤필병(尹弼秉) 및 공(公:이덕무)과 겸검서관 유득공(柳得恭), 동부승지 김효건(金孝建), 전 봉교 홍득유(洪得游), 행좌승지 이집두(李集斗), 검교직각 서영보(徐榮輔), 전 봉교 이중련(李重蓮), 좌부승지 이백형(李百亨), 병조 좌랑 정관휘(鄭觀輝), 우승지 신기(申耆), 주서 서유문(徐有聞), 병조정랑 정동간(鄭東幹), 전 검서관 이신모(李藎模)가 뽑혔다. 우등인 여섯 사람의 시권(試卷:답안지)에는 각각 어평(御評)이 있는데, 공의 시권에는 아(雅)자를 썼다.”


정조가 직접 성적을 매기고 평가를 내린 것도 흥미롭다. 1등은 신광하, 2등은 박제가, 3등은 이만수였으며, 윤필병, 이덕무, 유득공은 공동으로 4등에 올랐다.


신광하에 대해서는 ‘유성화(有聲畵:소리도 들리는 그림)’, 박제가에 대해서는 ‘해어화(解語畵:말을 알아듣는 그림)’, 이덕무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아(雅:아취가 있음)’라는 평을 내렸다.


「성시전도시」에 대한 최근의 연구에서는 한양의 모습을 그린 ‘성시전도’를 직접 보고 시를 지은 것이 아니라, 신하들로 하여금 한양에 대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시를 먼저 짓게 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양의 모습을 그림으로 제작하려 한 것으로 파악을 하고 있다.


정조는 북송 대의 화가 장택단(張擇端)이 수도 개봉의 풍경을 그린 그림인 「청명상하도」를 직접 보았을 것이며, 조선에서도 이런 형태의 그림을 제작하기 위한 전 단계로서 ‘성시전도’를 시제로 냈을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는 것이다. (박현욱, 『성시전도시로 읽는 18세기 서울』, 보고사, 2015년, 15쪽)


현재까지 「성시전도시」는 이덕무, 박제가, 신광하, 서유구, 이만수, 유득공, 신택권, 이학규, 신관호, 정동간, 이희갑, 김희순, 이집두 등 모두 13인의 작품이 전해지고 있다.(박현욱, 『성시전도시로 읽는 18세기 서울』, 보고사, 2015년, 13쪽)


서로 다른 문헌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13종의 「성시전도시」는 저자의 개성이 그대로 나타나 있으며, 18세기 한양의 생활, 풍속, 문화의 모습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이 되고 있다.


2. 이덕무의 「성시전도시」속 한양 풍경


1792년 정조의 명으로 응제시(임금의 명에 따라 지어서 올린 시)에 응하였고, 「성시전도시」를 자신의 문집에 수록해 놓은 이덕무의 작품을 중심으로 18세기 후반 한양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덕무는 먼저 ‘금척의 산하 일만 리 / 한양의 웅장한 모습 황도 속에 담겼네 / 한 폭의 황도 대도회를 그렸는데 / 역력히 펼쳐져 있어 손금을 보는 듯 / 글 맡은 신하 그림에 쓰는 시 지을 줄 알아 / 성한 일에 왕명을 받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라 하여, 왕명을 받아 시를 짓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한양의 관아, 지리, 풍속을 묘사해 나간다.


‘동월(董越)이 부를 지은 것 조금 뜻에 맞고 / 서긍(徐兢)이 그림을 만든 것 어찌 혼자 아름다우랴.’고 한 부분에서는, 당시 지식인들에게도 고려와 조선의 수도를 묘사한 대표적인 작품이 서긍의 '고려도경'과 동월의 '조선부'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정조의 의중을 파악했기 때문일까? 이덕무도 「청명상하도」를 언급하고 있다. ‘옛날에 청명상하도를 보았는데 / 눈을 비비며 호연히 변수인가 의심하였네.’라 한 부분이 그것이다.


당시 한양의 랜드 마크로 인식된 원각사 탑과 흥천사 종에 대한 묘사도 보인다. ‘원각사에 우뚝 솟은 흰 탑은 / 열네 층을 공중에 포개었고 / 운종가에 있는 흥천사 큰 종은 / 큰 집 가운데에 날듯이 걸렸네.’라는 기록이다.


‘오는 사람 가는 사람 갔다가 또 오는 사람들 / 인해 망망 끝이 보이지 않네.’라는 부분에서는 인구가 몰린 한양의 풍경을 생생히 묘사한다.


탑골공원 원각사 터에 남아있는 ‘원각사지10층석탑’

탑골공원 원각사 터에 남아있는 ‘원각사지10층석탑’


정조가 단행한 1791년 신해통공의 영향이 컸기 때문일까? 시장에 관한 묘사 부분에는 물화의 유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18세기 후반 서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일만 그루의 버드나무 푸른 빛 연하여 조는 듯하네 / 거리 좌우에 늘어서 있는 천 간 집에 / 온갖 물화 산처럼 쌓여 헤아리기 어렵네.’라고 한 기록에는 한양에 두루 늘어선 시전과 물화의 모습이 보인다.


다음으로는 시장에서 취급하는 물품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비단 가게에 울긋불긋 벌여 있는 것은 / 모두 능라와 금수요 / 어물 가게에 싱싱한 생선 도탑게 살쪘으니 / 갈치, 노어, 준치, 쏘가리, 숭어, 붕어, 잉어네. / 쌀가게에 쌓인 쌀 반과산 같으니 운자(雲子, 운자석: 빛깔이 흰 돌) 같은 흰밥에 기름이 흐른다. / 주점은 본래 인간 세상이나 웅백(熊白:곰의 모습이 흰빛의 기름과 같음을 묘사함) 성홍의 술빛 잔에 가득하네 / 행상과 좌고(坐賈:좌판 상인)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자질구레한 물건도 갖추지 않은 것 없네.’라는 부분에선 온갖 물품으로 넘쳐났던 시장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다.

박제가(1750~1805)가 올린 「성시전도시」에서도 ‘배오개와 종루와 칠패 / 바로 도성의 세 곳 큰 시장이로다. / 온갖 장인 일하는 곳 사람들이 붐비나니 / 온갖 물화 이문 쫓아 수레가 연이었네.’라 하여 한양 시장의 번성한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박제가는 시장의 모습 구석구석까지 들여본다. ‘광대들 옷차림이 해괴하고 망측하다. / 동방 장대 줄타기는 천하에 없는 것이라 / 줄 위를 걷고 공중에 거꾸로 서서 거미처럼 매달렸다.’거나, ‘물가 술집에는 술지게미 쌓여 보루가 되었네. / 눈먼 장님 호통치니 아이놈들 웃어대고 / 물을 건널까 말까 하는데 다리는 이미 끊어졌네 / 개백정이 옷 갈아입으면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해도 / 개는 쫓아가 짖어대고 성을 내며 흘겨 본다.’는 묘사에서는 시장에서의 광대 공연, 아이들의 호기심, 개 장수 이야기 등 시장의 다양한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덕무의 시장 이야기는 한강 교외로 이어진다. ‘서울 안의 물건과 경치 이미 다 썼으니 / 다시 교외로 좇아 한번 비평하여 보자.’고 한 후 ‘숭례문 밖에는 무엇을 보겠는가 / 강가의 창고에는 곡식이 억만 섬인데 / 연파에 끝이 없는 삼남의 선박 / 대밭같이 들어선 돛대 만 척이나 정박하고’라 하여 조선후기 세곡을 보관하던 경창, 그리고 한강을 무대로 활동한 경강 상인의 모습을 시로 표현하고 있다.


경강상인들의 활약을 보여주는 황포돛배

경강 상인들의 활약을 보여주는 황포돛배 - 서울역사박물관 상설전시실


이덕무의 성시전도시 마지막 부분은 ‘우리 임금 밝으시어 위태한 것을 잊지 않으시니 / 어찌 신의 말을 기다려 조심하리까 / 선왕의 덕을 이어 자손에게 좋은 법을 물려주면 / 영원히 복 내리는 것을 지켜보겠네. / 제경(帝京)의 경물을 묘사한 급취편(急就篇:한나라 원제 때의 작품) / 그 글을 본받았으나 저속할까 부끄럽네.’로 맺고 있다. 왕에 대한 칭송과 더불어 자신에 대한 겸손으로 마무리를 지은 것이다.


정조가 1792년에 출제한 「성시전도시」와 이에 답한 현존 작품을 통하여, 한 폭의 풍경화처럼 생생하게 다가오는 조선후기 한양의 풍경, 그리고 시장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