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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광명문화재단] 기획전시 서지원 개인전 <완전한 불완전(Complete Imperfect>

전시/미술

[광명문화재단] 기획전시 서지원 개인전 <완전한 불완전(Complete Imperfect>

  • 장소
    광명시민회관 전시실
  • 기간
    2021-10-21 ~ 2021-11-05
  • 시간
    10:00 ~ 18:00
  • 대상
    전 연령
  • 요금
    무료
  • 문의
    02-2621-8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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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의 글

올해 처음 광명문화재단에서 선보이는 광명 신진·청년 작가 1공모 및 선정 작가전 사업은 지역의 시각예술 활성화를 도모하고, 작가들의 창작 활동 지원 및 기회 제공을 위해 기획되었다. 이번 사업은 회화, 설치, 업사이클, 조각, 영상 등 시각예술 전 분야를 대상으로, 지역에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 가능한 신진, 청년 작가를 모집했다. 지난 7월 선정 작가 공모를 마무리 하였으며, 관련 분야 전문가들의 공정하고 투명한 심사를 통해 총 3(그룹)의 작가를 선정했다.
다양한 기준의 신진’, ‘청년작가라는 조건 중 특히 방점을 둔 부분은 물리적 기준보다는 현대미술계 내에서 실천적 단계로의 가능성을 가지고 영향력을 지속할 수 있느냐에 기준을 두었다. 또한 공모전 취지에 맞게 지원자들이 그동안 쌓아온 미학적 성취보다는 광명 신진·청년 작가로서 향후 펼쳐나갈 발전 가능성과 잠재력을 적극적으로 심사로 접근하였다.
 
광명 신진·청년 작가 1로 선정된 여인혁(설치), 서지원(회화), 키네시스(업사이클, 키네틱아트) 작가는 각자 고유한 예술적 언어와 재료를 통해 고민과 연구를 꾸준히 이어온 아티스트다. 이들이 선보일 선정 작가전 배턴패스(:Baton Pass)는 동시대의 개인과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결핍과 문제들을 자신만의 시각적 표현으로 풀어낸 예술적 실천의 장이 될 것이다.
 
첫 번째, 여인혁 작가의 개인전 <퐁퐁(Pong pong)>은 인간과 자연, 도시환경 사이의 관계와 상호작용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에 의해 일상 속 소비되는 식물에 대한 다각화된 시선을 두어, 식물과 기계의 비현실적인 작품을 제시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 평소 의식하지 못했던 익숙하고도 불편한 사실(Fact)을 직면하게 된다.
두 번째, 서지원 작가의 개인전 <완전한 불완전(Complete Imperfection)>은 독일의 극작가인 베르톨드 브레히트(Eugen Berthold Friedrich Brecht, 1898~1956)의 기법으로 잘 알려진 낯설게하기를 지향한다. 현실과 이상 사이 모호한 경계 속 알 수 없는 감정들과 일상 속 크고 작은 심리적 정황에 따른 요소들을 시각화 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 관람객은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주체로서 세상 속의 나가 아닌 세상과 마주하는 나의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키네시스(UAL×PAS) 작가의 개인전 <일 그리고 일(Work and work, one and one)>은 업사이클 작가인 엄아롱과 키네틱아트 작가인 박안식 작가가 그룹으로 참여한 전시이다. ‘이라는 중의적 표현을 사용하면서, 작가로서 예술적 행위(과정과 결과물)를 통한 경제적 수단인 ‘work’와 서로 다른 분야의 한 작가와 또 다른 한 작가가 만나 협업을 이룬다는 의미의 ‘one’을 동시에 제시했다. 작가의 개인적인 문제였던 생계 이슈에 대한 해결 과정을 키네시스의 작품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선정 작가들의 주제와 관심사는 다소 상이하지만, 구체적인 작업의 동기와 주목 대상은 그 자체로 동시대 예술과 사회를 다르게 또는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줄 것이다.
 
이 진 호
()광명문화재단 예술기획팀


Hunting

Hunting Trophy_ aclylic & oil on linen, 227.3 x 181.8cm, 2021



완전하게 불완전한 세계에서 그리기
서지원의 작품에는 일상의 풍경이 등장하지만 그 맥락은 애매하다. 그것은 그의 작품에 추상적 어법이 함께 해서만은 아니다. 풍경을 이루는 대상 중 하나인 식물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으며, 장소나 장소를 특징짓는 물건들의 기능은 상실되어 있다. 코로나 국면에서 대중들도 많이 보게 된 금지선들은 작품 속 풍경들이 불모나 불구가 된 이유를 암시한다. [완전한 불완전]이라는 역설적 전시 부제는 불완전도 완전하게 나타날 수 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이러한 역설은 예술에서만 긍정적이다. 완전한 표현을 얻은 불완전은 예술적 향유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완전한 표현을 통해 불완전을 개선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술가 자신이 이러한 개선을 위해서 손발을 걷어 부치지는 않는다. 적어도 서지원의 태도는 그렇다. 그는 이번 전시의 작가노트에서 나의 작품들은 현실에 대한 참여적인 입장보다 바깥에 존재하며 이곳을 직시할 수 밖에 없는 이방인의 위치를 드러낸다고 밝힌다.
전경에 현실의 모순이 응축된 대상이 놓여있다면 후경에서 작가는 자신의 감정을 쏟아낸다. 전경에 던져진 일상의 단편 배후에 과감하게 실행된 추상적 어법을 보면 그는 계몽주의보다는 카타르시스를 추구한다. 대개 추상적 배경 앞에 배치된 일상의 단편들은 거리두기의 결과이다. 금지된 풍경을 알리는 테이프는 화려한 색으로 거침없이 그어진 배경의 추상적 색과 대조된다. 작품 [swing chair](2021)는 놀이터 같은 공공장소의 어떤 기물을 금지 테이프로 꽁꽁 묶어놓은 모습이 보이는데, 들어가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용할 수 없도록 단단히 동여맨 상태는 그것이 놓인 지반이 왜 사라졌는지를 말한다. 하지만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자유로운 붓질이다. 광학적으로만 한정될 수 없는 현실적 어둠 속에서 화려한 색은 빛이 된다. 작품 [Goal](2021) 또한 어설픈 장애물이 설치된 금지된 장소지만 하얀 선들만은 분명하다. 모든 것이 심연으로 내려앉는 순간 규칙은 더욱 공고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작가는 회화적 실행을 통하여 자기만의 게임의 장 또한 만든다. [Playground](2021)는 플라스틱 의자와 테이프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놓은 운동장이 있는 작품으로, 인간들 대신에 식물들이 줄지어 자리를 지킨다. 작가는 들어갈 수 없는 운동장에서 물감으로 놀고 있다. 근저부터 허물어진 일상의 토대에서 색의 축제가 벌어진다. 하지만 서지원의 이전 작품에서 배경에서 실행되곤 하는 회화적인 면은 다소간 소극적이었다. 줄지어 서 있는 트라이포드가 마치 군상처럼 보이는 작품 [Empty Lot](2018)의 배경은 흐린 하늘색으로 쓸어내리듯이 그은 옅은 붓자국이 보일 따름이다. 마치 미사일처럼도 보이는 교통표지물로 고깔을 쓴 듯한 수직 구조물의 배경 또한 연하게 흘러내리는 물감으로 채워진다. 2018-2019년의 풍경들에 흐르는 감정선은 섬세했지만, 코로나 국면이 본격화된 최근 풍경의 배경은 질풍노도에 가깝다. 최근 작품들은 시대의 변화와 개인적 변화가 중첩되어 폭발적인 반응으로 나타났다.

코로나 국면 때문에 익숙해진 거리두기는 원래 예술의 주요 전략이었다. 그것은 미학적 좌파와 우파를 가리지 않았다. 근대예술의 자율성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한 칸트의 무관심성이나 서지원 자신이 참고하고 있는 현실 참여적 예술가 브레히트의 소격이론 등이 그러하다. 서지원은 2018년 스페이스 XX에서 열린 그룹전 [콘크리트 정글] 작가 노트에서 낯설지 않은 것을 낯설게 느껴라! 익숙한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느껴라! 일상적인 것에 너희는 놀라야 한다. 규칙이라고 하는 것의 오용을 알아차려라. 그리고 오용인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을 제거하라!’고 말한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인용한 바 있다. 낯설게 하기는 문학과 그 이론에서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A. 아이스테인손은 [모더니즘]에서 낯설게 하기의 시작을 러시아 형식주의로 소급한다. 그는 빅토르 슈클로프스키의 [테크닉으로서의 예술]을 인용하면서, 그것이 물신화된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무기고로 평가되었다고 한다.
아이스테인손은 브레히트가 소외효과 이론에서 슈클로프스키의 개념을 더욱 발전시켰다고 지적한다. [모더니즘]에 의하면 슈클로프스키는 미학적 자율성과 시적 언어와 일상적인 언어의 분리를 주장하는 일반적인 형식주의 강령에 지배받는다. 러시아 형식주의자에 의해 부각된 낯설게하기는 기호학적 혁명으로 평가되었지만, 너무 멀리 나아갔다. 형식적 실험은 형식주의로 귀결될 위험이 있었고, 그것이 모더니즘의 기조가 되었을 때 의미의 위기에 직면했던 것이다. 문예사조사는 형식과 진보를 연결시킨 흐름이 혁명기에 잠시동안만 지배적 질서와 함께 했음을 알려준다. 현실로부터 거리를 두는 미학적 효과에서 현실이 점차 사라지면 무엇에서 어떻게 거리가 설정된 것인지 모호해진다. 이론의 태생부터 선명한 모순은 반복된다. 서지원의 작품 또한 낯설게 하는 형식적 장치와 사회적 메시지 또한 담으려는 두 충동이 맞부딛히는 장이다.
읽기와 그리기가 어느 정도의 비율이어야 하는가는 지금도 고민하는 문제다. 단순화하자면 소통인가 매체인가의 문제다. A. 아이스테인손은 모든 예술 존재하는 이 두 가지 모순적 충동에 대해, ‘마니교의 선악의 대결상태’(윌리엄 개스)로 간주된 예까지 들고 있다. 매체가 소통의 도구인가 그 자체의 목적인가의 문제에 대한 문학 분야의 대응은 문학 언어와 일상 언어의 차이’(블랑쇼)를 구분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 차이가 극대화될 때 형식주의가 될 수 있다. ‘언어의 감옥’(프레드릭 제임슨)에 갇히곤 하는 형식주의는 단순히 현실을 반영하는 리얼리즘만큼이나 예술의 걸림돌이 된다. 순수한 조형적 언어로만 작업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형식주의 논리는 그린버그의 주장에서 정점을 이루었고, 그것은 전후 추상미술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서지원은 분명히 작업을 통해 발언하고자 하며 소통하고자 한다. 형식을 통한 현실과의 거리두기는 형식주의가 아닌 현대적 리얼리즘일 수도 있다.

현대 자체가 단편들로 이루어진 세계라면 자연스러운 총체성을 가정하는 전통적 어법이나 대중문화는 거짓된 것일 수 있다. 예술가는 이 거짓된 총체성에 균열을 내려고 한다. A. 아이스테인손은 브레히트의 서사 극장의 중추적인 요소를 방해(interruption)로 파악한다. 이러한 방해의 미학은 자못 자연스러운 듯한 총체적 세계’(루카치)에 반대하여 예술 생산을 위한 모델을 설정한다. [모더니즘]은 브레히트 이론을 철학자 알튀세르의 용어로 다시 읽는다. 알튀세르는 실제 세계의 존재 조건과 개인이 맺는 상상적인 관계를 재현한이데올로기를 언급하면서, 주어진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이데올로기를 차단하기 위해서 세계를 소외시켜야 하며, 그런 세계와 맺는 우리의 상상적 관계는 방해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지원의 작품에서는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듯한 전경의 대상 뒤편의 붓질들이 방해의 요소다. 거기에는 대상의 맥락을 설명해 줄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는데, 작가는 그것을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거침없는 붓질은 그 앞에 호명한 일상의 단편을 표류하게 한다. 스퀴즈를 이용한 작품은 뭉개버린 것 같은 효과도 준다. 어떤 작품의 경우는 현실을 그대로 베껴내는데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맥락이 탈루 된다. 대상만 오려내어 관객 앞에 던지는 스타일이다. 구별되는 두 세계의 공존은 [완전한 불완전]이라는 부제에도 잘 나타난다. 그것은 문예사조사에서의 논쟁만큼이나 과학 분야에서 논쟁을 일으킨 불완전성 정리’(괴델)의 역설이 있다. 레베카 골드스타인은 수학자 괴델의 평전인 [불완전성-쿠르트 괴델의 증명과 역설]에서 괴델의 이론을 수론에 적합한 어떤 형식체계에나 결정 불능의 식, 곧 그 자체는 물론 그 부정도 증명도 할 수 없는 식이 존재한다. 이로부터 수론에 적합한 어떤 형식체계의 무모순성은 그 체계 안에서는 증명할 수 없다는 따름정리가 나온다.’고 정리한다. 평전의 저자는 괴델은 형식적 산술체계의 무모순성은 그 체계 안에서는 증명할 수 없음을 보였다. 괴델의 논문은 어떤 수학적 결론은 증명될 수 없다는 사실, 곧 수학이 어떤 공리들을 채용하든 증명될 수 없는 진리가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고 말한다.
가장 정확한 분야인 수학에서 불완전성의 확실성이라는 역설이 존재한다는 이론은 인간이 만든 형식에 불과한 것을 절대화할 때의 오류를 경고한다. 레베카 골드스타인은 괴델의 정리들은 인간 정신의 한계를 보여주는 게 아니며, 오히려 인간 정신의 계산적 모델, 곧 모든 사고를 규칙 전개로 보는 모델에 내포된 한계를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즉 괴델의 정리들은 우리를 포스트모던적 불확실성에 빠뜨리는 게 아니라 인간 정신에 대한 특정의 환원적 이론을 배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형식주의의 닫힌 완전성을 불완전하지만 열린 체계로 바꾼다. 총체적 재난의 상황에서 누구한테나 공정하고 중성적으로 작동하는 듯한 형식()이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하는 것은 한가한 말놀이가 아니다. 대개 지배적 현실은 불완전을 완전으로 개선하려 할 것이며, 아니면 애초에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근대 이후 예술 자체가 주변화되었기에 타자적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게 된 예술가에게 현실의 불완전성은 더욱 눈에 띈다.

이러한 소외 때로는 탄압은 근대미술을 부재와 상실감으로 가득하게 했다. 서지원의 초기 작업은 사회적 불만이나 주체의 불안이 다소간 잔잔하게 드러난다면, 이번 전시의 주요 작품들에 현실에 대한 부정적 기류는 매우 강렬하다. 확실한 대답보다는 생각할 거리를 주려는 작가의 태도를 본다면 부정적 기류라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부정은 긍정을 위한 전 단계로 포함되어 있다. 즉 서지원의 작품 스타일의 변화는 현실에 대한 부정이 예술에 대한 긍정으로 변화하는 지점을 통과하는 증후로 다가온다. 그래서 현실의 불완전함도 제대로 표현한다면 예술적 완전성으로 전환될 수 있다. 그것은 소외된 작가가 당대의 지배적 현실에게 가할 수 있는 반응일 것이다. 아직도 그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는 코로나 국면은 작품 속 금지선을 알아보게 한다. 아무렇게나 여기저기 묶여 있는 금지선은 어느덧 익숙해졌지만, 작가는 이 새로운 익숙함 속에서 그동안 잘 보이지 않던 것을 드러낸다.
그것은 미셀 푸코 등 현대의 철학자들이 주목한 일상에 편재하는 미시적 권력이다. 작가는 굳이 멀리 나서지 않는다. 자료 조사를 치밀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가 오고 가며 쉽게 발 닿는 곳들은 대개 놀이터, 운동장, 공원 등 인근 공공적인 장소들이다. 전 세계적인 감염병 국면이 길어지기도 했지만, 아무렇게나 묶어놓은 금지선들은 폭력적으로 다가온다. 얼마 전 신문에서 갈 곳이라고는 파고다 공원 밖에 없는 노인들이 해를 넘겨서도 계속되는 출입 금지에 고통받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어르신들은 늦게 시작된 접종에도 불구하고, 다른 세대들보다 일찌감치 접종도 마쳤고 간단한 확인을 거쳐 출입할 수도 있는 방법을 찾지 않고, 무조건 금지를 계속하는 것은 공권력을 손쉽게 쓰는 경우다. 권력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금지가 아니라 좀 더 세밀하게 사용자들을 살피는 것이 필요한데, 당장에 자기 앞에 떨어진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거친 해법이 횡행한 결과다.
서지원의 작품에서 아무렇게나 묶여 있는 출입 금지선은 그러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관료들은 이러한 풍경이 현재의 비상 상태를 표현해주고 자신들이 열심히 조치를 취했다는 증거로 볼 것이다. 권력의 입장에서는 사용자들이 가난한 노인같이 유령화 된 존재라면 일고의 가치도 없을 것이다. 서지원의 작품 속 텅 빈 장소들은 양극화된 세계에서 유령은 더욱 늘어날 것임을 예견한다. 담당 관료들의 최소한의 조치와 국민들의 최대한의 불편함은 그동안 암암리에 실행되었던 권력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런 예는 많이 발견되며, 작가가 본 여러 공공장소들도 그 예에 속한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풍경을 또 한번 거리를 두며 본 서지원의 작품은 권력의 공공성이 누수되는 지점을 건드린다. 하지만 부재나 부조리 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 단순한 네거티브는 아니다. 단순한 부정은 현실과 상보적으로 존재하면서 현실의 질서를 더욱 공고히 한다.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다.

일상에 적용된 공권력이 있는 칙칙한 전경 뒤로 선명하고도 열정적인 색감과 붓질은 또 다른 차원의 현실도 있음을 알려준다. 거기에 금지는 없다. 경계도 없다. 다만 질곡으로부터 탈주하려는 속도가 있을 따름이다. 전례 없는 재난은 이름 없는 민초들과 익명적 권력이 맞붙는 장을 더 확장시켰다. 서지원의 작품에 등장하는 자연은 아무렇게나 취급받는 민초와 비교될 수 있다. 인간은 자연에 대한 권력자다. ‘만물의 척도인 인간은 자연을 소유하고 지배한다. 공공영역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제로섬 게임 속 보이지 않는 이해관계가 암시된 사회적 풍경이었다면, 자연에 가해지는 힘들에서 나쁜의도 같은 것은 발견되지 않는다. 단지 인간이 자연을 자유롭게이용하고 소유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서 비롯된 어긋남이 나타날 뿐이다. 자연 또한 타자지만, 유령화 된 인간들보다 더 침묵을 강요당한다. 자연은 새삼스럽게 호들갑 떨어야 하는 재난이 아니라 항시적인 재난 상태에 있었다.
자연의 재난이 사회로 옮겨온 것이 집단 감염병 사태다. 이미 정복했다고 믿어졌거나 저 멀리 있다고 생각되던 자연은 인간 사회 한가운데에서 폭발한 셈이다. 서지원의 작품에서 인간은 자연을 전유하기 위해 제멋대로 재단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보기 좋으라고 설치한 식물 지지대나 식물에 해로울 것이 분명한 시멘트 화분 등이 그렇다. 작품 [Big Pot](2021) 시리즈는 마카오의 한 공원의 수풀에 있었던 시멘트 화분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같은 크기로 제작된 시리즈가 한 나무를 여러 각도에서 포착된 것인지 이런 나무들이 여러 개 있는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그렇지만 같은 조건에서 같은 형태가 나올 것은 분명하다. 작가의 눈에 띈 것은 수풀 안에 굳이 있을 필요 없는 시멘트 화분이다. 그 안에 비스듬히 있는 나무는 죽은 것은 아니고 바람에 의해 기울어진 것이다. 볼썽사나운 기우뚱한 나무는 지금 있는 자리가 불편한 유기체를 연상시킨다.
잡초와 한 화분에 있는 나무의 경우. 그냥 땅이었다면 그렇게 비좁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시멘트 화분은 인간이 자연에 자기의 흔적을 남기려 한 의지의 결과물은 아닌지. 자연을 전유하는 방식은 자연에 도움이 안되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안좋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인간이 어떤 조치를 취하든 간에 자연은 정해진 자신의 방향으로 간다는 다소간 긍정적 사실도 보여준다. [Cactus](2021) 시리즈는 시멘트 화분 속 식물처럼 자연에 가한 인간의 조치가 얼마나 흉물스러운지를 보여준다. 선인장은 유기체 특유의 부드러움보다는 사물같은 딱딱함으로, 살아있는지 죽어있는 모호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외형은 수분이 모자란 지역에서 진화한 결과다. 하지만 선인장은 원래 살던 자리에서 이동하여 곧게 자라게 하려는 인간의 의도에 맞춰 지지대에 의지한 채 관상용으로 소비된다. 분재처럼 철사줄로 칭칭 감긴 선인장의 경우에는 제목이 아니면 원래 그것이 무엇인지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왜곡되어 있다.

형태 교정 선으로 감긴 선인장은 묶인 짐승처럼 고통스럽게 보이는 가운데, 아래를 향하는 배경의 붓질 또한 감정이 실려있다. 선인장 시리즈에서 겹겹의 부자연스러운 장치에 둘러싸인 식물의 배경은 시원스럽게 칠해진 자유로운 색이다. 예술의 자율성이 자연의 해방과 보조를 맞춰준다면 그 또한 참여하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작품 [Concrete Tree](2018)는 화분에 흙이 아닌 콘크리트가 채워진 기이한 대상이다. 아마도 주차 방지를 위한 삶의 발명품일 것이다. 죽은 식물은 영역표시를 위해 살아있는 듯이 서 있다. 배경에 흐릿하게 흐르는 물감 자국들은 한 때 식물이 살아있음을 알려줬던 태양과는 반대 방향으로 내리누른다. 작가는 실제보다 더 크게 이 보잘 것 없는 화분을 그림으로서 한때 살아있던 생물에 가해진 폭력을 고발한다.
[Mummy](2021) 시리즈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작품이다. 한 작품은 잎과 줄기가 부스러지는 상태의 말라 죽은 식물이다. 이 모노톤의 생명체의 배경은 여러 색의 층이 있는 추상적 붓질이다. 또 하나의 작품은 화면 좌측에서 불쑥 나온 식물의 일부를 보여준다. 쌍으로 제작된 다른 작품과 달리 아직 푸릇한 기운은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대지로부터 분리된 듯한 이상한 방향성과 침울한 배경색은 그것이 이미 죽어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작품 [Hunting Trophy](2021)는 화초가 사냥한 사슴 머리 모양으로 배치된 것을 표현했다. 이러한 배치의 원형인 헌팅 트로피는 인간이 자연을 전유하는 폭력적 방식을 오래된 장식의 형식으로 보여준다. 사냥한 동물의 머리 뿔은 연상시키는 가지들은 땅에 뿌리 내린 식물의 생태를 거슬러 인간의 눈높이에 맞춘다. 인간의 방식대로 사랑받는 자연은 왜곡되고 비틀린 모습이다. 지지대로 칭칭 동여매진 부자연스러운 모습은 인간의 가학피학적인 사랑을 떠오르게 한다.
자연의 모습 그대로가 자유로움을 상징한다면 인간화된 자연의 모습은 구속적이다. 작품 속 식물들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불확실하며, 더 정확히는 살아있는게 살아있는 것이 아닌, 생명이 아닌 물화 된 모습으로 다가온다. 동물의 운명도 식물과 큰 차이가 없다. 작가가 키우던 새의 흔적을 표현한 시리즈 작업은 드물게 동물을 소재로 했지만, 빈 화분처럼 부재의 흔적으로 나타난다. 키우던 새집이 앞에 놓여있고 그것의 일부들을 그린 작품들이다. 새집 표면의 오물들은 더러워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새가 살아있었음을 나타내는 표시다. 물감 자국처럼도 보이는 새의 배설물에서 물감과 작가의 분변을 비교하는 근대적 전통도 깔려있다. 화가가 의지하던 단단한 상징적 우주가 붕괴되던 시기에 작가는 자신만을 나침반으로 삼을 수 밖에 없었다. 구체적 대상으로부터 출발한 사실적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부분으로만 보면 어떤 대상인지, 구상인지 추상인지도 불확실하다.

각 화면들은 대상이 화면에 너무 바짝 당겨져서 무엇인지 파악이 잘 안된다. 바탕이 나무판의 묘사인지, 그냥 붓질인지 알 수 없다. 과도한 근접성은 친숙한 대상과의 거리두기의 또 다른 방식이다. 그것이 속한 전체를 상상할 수 없는 이유는 각 단편들이 의미화가 가능할 적절한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하나의 지시대상으로부터 시작되는 다양한 유희를 행한다. 정사각형 화면에 그려진 단편들은 전시공간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설치될 수 있다. 반려동물의 죽음이 야기한 상실감은 작은 새집 하나를 출발로 하는 수많은 변주를 낳았지만, ‘죽은 자식 나이 세기같은 부질없음도 분명하다. 가출을 반복하다 죽은 새의 본 고향은 도시가 아닐 것이다. 자연이 인간에, 특히 도시화 된 현대인에 맞춰야 하는 일은 죽음에 이르는 위험을 담보하는 것이다. 동물은 식물보다 전유하기가 더 힘들다. 그래서 동물은 인형이나 동상같은 것으로 만들어져 보다 가지기 쉬운 것으로 변한다.
그러나 그럴 때 조차도 잘못된 사용을 피할 수 없었다. 자연은 여러 번 이용당하고 여러 번 죽는다. 하지만 자기만 죽지는 않는다. 세계가 연결되었듯이 자연 또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는 일면식도 없는 인간들이 서로 간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통스러울 수 있는지 알려준 인류 최초의 재난이 아닐까. 작품 [Dear Deer]는 사슴 상에 안전 제일 테이프로 칭칭 감아 놓은 풍경인데, 튀는 색으로 내리그은 추상적 배경은 메시지와 관련된 사슴 상과 식물을 뒤덮지 않는다. 주변의 조명을 되비치는 눈부분의 빛은 억압된 자연이 풀려나 생겨난 재난을 증거 한다. 그동안 자연을 함부로 다뤄온 인간/권력은 사슴상마저 금지함으로서 재난에 대한 괴이한 해법을 제시한다. 그 소재가 동물이든 식물이든, 이러한 소재는 인간 대 자연의 구도라기보다는 강한 권력과 약한 권력의 대조라고 봐야 할 것이다. 서지원의 작품은 그 배경이 도시든 자연이든 사회적 풍경으로 봐야 하는 이유다.
편재하는 일상의 권력에 대한 관심은 가까운 것을 선택하게 했다. 그것은 거리두기의 조건이기도 하다. 아직도 세계의 한 켠에는 전통사회의 공개 처형같은 권력의 협박이 있지만, 현대의 권력은 대중들이 알게 모르게 미시적으로 작동한다. 사회를 이루는 상징적 우주의 법칙을 내면화해야 큰 도둑질도 합법적으로 한다. 보다 소박하게는 자아실현이라는 명목으로 사회적 억압을 내면화하기도 한다. 서지원의 작품은 옮음과 그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모호해진 상황을 반영한다. 작가로서의 실천은 이 모호한 상황에 거리를 설정함으로서 우리가 처한 현실을 재맥락화하는 것이다. 그의 초기작은 추상의 비중이 적었지만 여전히 모호했다. 일상이라는 소재는 연속적이지만 이러한 소재들은 가라앉은 공기 속에 정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최근 작품을 특징짓는 화려한 색과 역동적 붓터치는 당면한 상황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감정적 반응이다.

 
그것은 코로나 국면이 사회적 약자에게 가한 더 큰 폭력에 대한 반응이다. 총체적 재난은 사회에 이미 존재했던 균열을 더 벌린 것이다. 30대 후반에 접어든 전업 작가의 불안감과 시대의 불안이 만난 결과다. 화면의 배경 부분의 처리는 응축된 내면을 발산하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여전히 그것이 이전 작품처럼 수수께끼인 것은 여러 겹 실행된 작품의 층 때문이다. 구상과 추상이 공존하는 형식적 전략은 감정의 전달에도 메시지의 전달에도 교란적일 수 있다. 작가는 경계 위에서 도박한다. 그는 분명히 생각할 거리를 주는 소재를 화면 한가운데에 던지지만, 자신의 역할이 한정적임도 깨닫는다. 물론 이러한 한정성은 뒤로 물러남이기 보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하려는 선택이다. 그는 다른 분야에서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소재나 주제 뿐 아니라, 색과 질감으로도 말할 수 있는 화가로서, 이러한 형식적 장치는 메시지를 증폭시킬 수 있다.
즉 그의 화면은 메시지 전달에 필요한 구상적 요소와 그 메시지의 강도와 밀도를 높여줄 추상적 요소가 공존한다. 지시대상과 무관한 색의 선택, 물감의 양, 붓의 속도, 붓 이외의 다양한 도구(나이프, 스퀴즈 등)의 사용 등은 전경에 배치된 묘사의 기술과는 또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 묘사의 언어는 투명해야 하지만, 행위의 언어는 불투명하다. 어떤 색을 선택하는지 붓질이 어떤 강도와 밀도가 될 것인지는 임의적이다. 그것은 의미가 아니라 존재다. 서지원은 자신의 작업에서 메시지와 그리기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의식하며, 양자 간의 비율을 생각한다. 하지만 명확하게 답을 내리지는 않는다. ‘완전한 불완전이라는 전시 부제를 형식적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배경의 회화적 어법은 메시지 전달이라는 점에서 불완전하지만, 메시지로 환원될 수 없는 회화에 완전함을 부여하는 요소다. 의식을 벗어난 영역까지 작업을 확장시킬 수 있는 장이다. 이 미지의 영역에서 우연과 꿈, 몸과 무의식은 총동원 된다
 
이 선 영
미술평론가


Playground, acrylic & oil on linen, 100.0 x 95.0cm, 2021

Playground, acrylic & oil on linen, 100.0 x 95.0cm, 2021



관중석_ acrylic & oil on linen, 115.0 x 110.0cm, 2021

관중석_ acrylic & oil on linen, 115.0 x 110.0cm, 2021




Goal_ acrylic & oil on linen, 115.0 x 110.0cm, 2021

Goal_ acrylic & oil on linen, 115.0 x 110.0cm,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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