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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안창모 교수 & 박광일 역사전문가

친절한 서도건씨 책을 만나다 Episode4. 안창모 교수 & 박광일 역사전문가

  • 영상출처
    서울도시건축전시관-유튜브(seoul hour)
  • 등록일
    2021-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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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막

01:05 ‘제국’은 황제의 나라라는 뜻이고, ‘민국’은 민의 나라, 즉 국민의 나라를 뜻합니다. 대한제국은 제국의 틀을 갖추고 있었지만 민을 중심에 두고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국호도 그 정신을 계승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03:51 고건축은 조선시대의 건축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1876년을 근대로 생각하는데, 1897년에 대한제국의 법궁이 된 덕수궁은 고궁이 아닌 근대 궁궐입니다.

06:59 덕수궁 안 세 개의 서양식 건물이 있는데, 건축 양식이 각기 다릅니다. 석조전은 서양의 신고전주의 양식을 제대로 갖추고 있고, 중명전은 벽돌로 지어져 실용적이고, 정관헌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차를 마시는 공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 건물은 공통적으로 ‘베란다’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당시 동남아시아를 지배했던 유럽의 새로운 건축 양식으로 우리나라에 반영된 것입니다.


11:08 외교와 관련된 공사관은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자국의 힘을 보여주는 다분히 정치적인 건축입니다. 언제, 어디에 지어졌는지도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사대문 안에 미국을 필두로 프랑스, 영국, 러시아, 독일 등이 정동에 자리 잡습니다. 정동은 덕수궁과 더불어 대한제국의 탄생과 함께 국세 정세, 지리적·도시적 상황에 주요한 상징성을 갖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18:23 고종은 ‘광무개혁’이라는 근대국가 건설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서양식 군대인 무관학교를 서대문에 만들었고, 서양식 화폐 제도를 위해 전환국도 설치했으며, 서구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경인 철도도 만듭니다. 아관파천 당시, ‘세계열강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여 세워진 ‘독립문’의 건설이 대한제국으로 가는 첫 번째 선언적 행위였다고 생각합니다.

26:29 덕수궁은 근대의 도시 궁궐입니다. 근대 이전의 시대는 소수가 권력과 지식을 독점하였지만 근대는 지식과 권력을 함께 나누는 시대였습니다. 경복궁이나 창덕궁처럼 왕을 먼저 생각하는 궁궐이 아닌 ‘왜 이 시대의 궁궐이 이전 시대의 궁궐과 달랐어야 했는지’, 우리의 눈으로 역사를 보는 시작점이 덕수궁이면 좋겠습니다.

28:41 서울을 ‘600년 역사 도시’라고 합니다. 조선의 역사는 500년이었고, 나머지 100년은 대한제국 이후의 역사입니다. 역사 도시라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삶을 축적해 보여주는 현장입니다. 도시 서울은 조선의 역사뿐 아니라 대한제국의 역사와 일제 강점기의 치욕도 훌륭하게 극복해 냈습니다. 과거의 어떤 것들을 쌓아가되 새로 들어오는 것들도 우리의 자산으로 만들어 서울의 역사로 가져갈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건축 역사학자 안창모 교수님과 역사전문가 박광일 선생님을 만나 덕수궁과 정동 일대의 한국 근대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