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소개
서울역사박물관 조선시대의 서울 (상설전시 1존)
조선 건국 후 한양 정도(定都)부터 개항 이전까지 조선시대의 서울을 보여주는 공간으로서, 한양의 육조거리와 시전을 중심으로 북촌, 중촌, 남촌, 그리고 성저십리에 걸쳐 다양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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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건국과 수도 한양
1394년 한양 땅이 새로운 도읍지로 정해졌다. 새 수도는 우리의 옛 전통과 풍수지리, 그리고 유교적 이념을 겸비하여 건설되었다. 먼저 우리의 성곽 전통에 따라 산세에 의지하여 도성을 건립하고, 그 안에는 『주례』의 「고공기」에 나오는 ‘좌조우사左祖右社’의 이념에 맞추어 궁궐과 함께 종묘와 사직을 배치하였다. 수도의 성곽은 백악산을 비롯한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 쌓으면서 평지 부분을 연결하여 완성하였다. 궁궐은 백악산 기슭의 명당자리에 건설하고 좌측에 조상신을 모시는 종묘를, 우측에 토지와 곡식의 신을 모시는 사직을 두었다. 아울러 육조를 비롯한 주요 관청을 궁궐 앞에 배치하였으며 시전은 동서를 연결하는 대로변에 설치하였다. 이로써 한양은 조선의 수도로서 500년 역사를 담을 도시의 기본 틀을 갖추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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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양의 변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조선은 일찍이 없었던 대전란에 휩싸였다. 전국의 생활 기반 시설은 물론 사회·경제체제 또한 무너져 막대한 국가적 손실을 입었다. 7년간의 임진왜란으로 수도 한양의 궁궐과 종묘, 대부분의 관청과 시전행랑 등 도시 기반 시설과 가옥들이 약탈과 화재로 잿더미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와 광해군 대에 종묘와 창덕궁을 비롯한 도시 시설을 재건하면서 왕도의 모습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전후 혼란이 채 수습되기도 전에 명·청과의 외교문제로 병자호란이 발발하였다. 병자호란의 전란 기간은 짧았지만 조선의 패배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비롯한 왕족과 50만 명에 달하는 양민들이 인질로 잡혀가는 등 그 피해는 매우 컸다. 이 두 번의 전란 이후 조선은 전후 복구를 위해 정치·사회·경제 전반에 걸쳐 기존의 국가운영 체제를 재편하는 등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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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양의 번영
조선전기 한양은 왕과 고위 관료 등이 주로 거주하는 왕도王都였다. 왕도였던 한양이 상업도시로 변모한 것은 17세기 후반 이후였다. 17세기 후반 삼남 지방의 대동법 실시, 금속화폐 유통 등으로 한양에서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고, 대부분의 거래가 화폐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체제가 확립되었다. 노동력을 돈으로 사고 팔 수 있게 되면서 특별한 기술이나 재산이 없는 지방 사람들이 대거 한양으로 몰려들었다. 한양에서는 이들이 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상업이 크게 발달하였는데, 수상교통의 중심인 마포, 서강, 용산 등 경강의 주요 포구가 상업 발달을 견인하는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상업과 더불어 왕실과 양반들에게 고급 사치품을 제공하는 금방, 은방, 옥방 등과 같은 민영 수공업도 발달하였다. 그 결과 한양의 인구가 많이 증가하였고, 인구의 구성 또한 상인과 수공업자, 임노동자가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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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양도성 안 마을
조선시대 한양의 도시공간은 한양도성을 기준으로 도성 안과 도성 밖 성저십리 지역으로 나뉜다. 여기에 한성부의 행정편제로 도성 안팎 지역을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의 오부로 나누었다. 한편 한성부의 공식 행정 구역인 오부와는 별개로 도성 안은 지세와 수계를 중심으로 북촌, 남촌, 중촌, 동촌, 서촌(웃대), 아랫대의 지역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백악산 아래인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지역인 아랫대와 북촌, 남산 북쪽 기슭 아래를 남촌, 광통교에서 종묘 앞 효경교에 이르는 개천 양안 지역을 중촌, 경복궁 서쪽의 개천 상류 지역을 서촌(웃대), 효경교에서 오간수문에 이르는 개천 하류 지역을 아랫대, 낙산 서쪽 기슭을 동촌이라 했다. 이들 지역은 자연 경관과 입지 조건, 거주자들의 신분적 특성에 따라 각각 지역문화 양상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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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성 밖 한양, 성저십리
도성 밖 성저십리의 범위는 동쪽으로는 양주 송계원과 대현까지, 서쪽으로는 양화도와 고양 덕수원까지, 남쪽으로는 한강과 노량진까지 속한다. 조선전기에는 도성 밖에 많은 사람들이 살지 않았지만 조선후기가 되면 한양 인구의 약 50%가 거주하게 된다. 성 밖에 살았던 이들 가운데에는 지방에서 상경하여 상업에 종사하거나 날품을 파는 빈민들이 많았다. 마포, 용산, 서강 등지는 전국에서 올라온 세곡과 상품들이 몰려들어 상업의 중심지로 번성하였다. 그리고 동대문 밖 왕십리나 살곶이벌 등지는 한양 사람들이 소비하는 채소 등을 재배하는 근교농업의 중심지였다. 도성 밖 성저십리는 조선후기 한양이 왕도에서 상업도시로 변모했음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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