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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에 즉위한 헌종, 가장 닮고 싶었던 왕은 누구?

  • 등록일 2023-03-29
  • 작성자 관리자

헌종은 정조의 뜻을 이어받아 소주합루를 승화루로 개칭했다. 사진은 삼삼와 및 승화루.

헌종은 정조의 뜻을 이어받아 소주합루를 승화루로 개칭했다. 사진은 삼삼와 및 승화루.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43) 헌종, 정조를 롤모델로 삼다

조선의 왕 중에서 가장 어린 나이에 즉위한 왕은 헌종(憲宗:1827~1849, 재위 1834~1849)이다. 1834년 8세의 나
이로 왕이 되었지만, 재위 기간은 15년으로 짧지가 않았다. 그러나 왕으로 있던 시기는 대부분 10대의 나이로서,
대비인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15세 무렵 친정(親政)을 하기 시작한 헌종은 특히 증조부 정조를 닮고자 노력을 했다. 창덕궁에 있는 소주합루
(小宙合樓)와 낙선재(樂善齋), 그리고 낙선재를 구성하는 건물 중의 하나인 석복헌(錫福軒)은 헌종이 정조를 롤
모델로 삼았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헌종은 8세에 왕위에 올라15세가 되던 해 친정(親政)을 하게 된다. 헌종은 특히 정조를 닮고자 노력했다."
 
 

승화루와 헌종의 서화 사랑

헌종은 효명세자(孝明世子)와 신정왕후(神貞王后)의 장자로서, 이름은 환(奐), 호는 원헌(元軒)이다. 1827년 7
월 18일 창경궁 경춘전(景春殿)에서 태어났다. 경춘전은 증조부 정조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헌종 즉위 후 대
비인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고, 1841년 15세가 된 헌종은 친정(親政)을 하게 되었다. 왕이 20세가 될
때까지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8세에 즉위하여 수렴청정이 너무 길었기 때문에 5년을 단축한 것
이다.

헌종은 정조의 뜻을 이어받고자 하는 의지를 담아 소주합루(小宙合樓)를 승화루(承華樓)로 개칭하고, 정조가 세
운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의 정신을 적극적으로 계승하려고 하였다. 정조는 1776년 즉위 직후 개혁의 공간으로
규장각을 건립하였는데, 규장각의 2층이 바로 주합루(宙合樓)였다.
 
 
 
창덕궁 내 주합루의 모습, 정조는 중희당 근처에 주합루를 모방한 소주합루를 세웠다.
창덕궁 내 주합루의 모습, 정조는 중희당 근처에 주합루를 모방한 소주합루를 세웠다.
 
 
정조는 1782년(정조 6) 세자의 공간으로 중희당(重熙堂)을 건립하였으며, 바로 이웃한 곳에 주합루를 모방한 소
주합루를 세운 것이다. 1층에는 세자가 읽을 책을 보관하는 서고인 의신각(儀宸閣)이 있었고, 소주합루는 책을
읽거나 휴식을 취하는 2층 공간이었다.

헌종은 1847년 낙선재를 지으면서 소주합루의 이름을 승화루로 바꾸었다. ‘승화(承華)’는 ‘정화(精華)를 잇는
다.’는 뜻으로, 많은 책과 글, 그림을 수집하여 그 빼어난 정화를 이어받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승화루 뜰엔 큰 돌을 움푹 파서 만든 작은 연못인 ‘향천연지(香泉?池:향기나는 샘과 벼루같은 연못)’가 있어서
운치를 더해 주었다. 헌종은 정조가 그랬던 것처럼 승화루에 많은 서책을 보관했다.
 
 
"헌종은 승화루에 서책을 보관했다. 
정조가 그랬던 것처럼 장서를 보관하고 서책을 연구하려는 헌종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낙선재는 창덕궁과 창경궁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낙선재는 창덕궁과 창경궁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낙선재를 짓고 올린 상량문에는, “동벽(東壁)에는 온갖 진귀한 서책들 빛나고, 서청(西淸)에는 묵은 나무 휘날려
창이 영롱하다. 잘 꾸며진 서적들이 많고 아름다운 비단 두루마리는 성상이 을야(乙夜: 밤 10시경)에 볼 자료로
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정조를 계승하여 장서들을 보관하고 서책을 연구하려는 헌종의 의지를 엿볼 수가 있다.

헌종은 특히 김정희의 글씨를 좋아했다. 김정희의 제자인 소치 허련(許鍊:1809~1892)은 “낙선재로 들어가니 바
로 상감이 평상시 거처하시는 곳으로 좌우의 현판 글씨는 완당(阮堂:김정희의 호)의 것이 많았습니다. 향천(香
泉), 연경루(硏經樓), 유재(留齋), 자이당(自怡堂), 고조당(古藻堂)이 그것이었습니다. 낙선재 뒤에는 평원정(平
遠亭)이 있었습니다.”고 하여 헌종의 부름을 받아 낙선재에 들어가 김정희의 작품을 직접 본 모습을 『소치실록』
에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