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21) 송시열과 대명의리론(大明義理論)의 공간들
도봉산 올라가는 길 ‘도봉동문(道峯洞門)’이라고 쓰여 있는 바위
조선의 18대 왕 현종(顯宗:1641~1674, 재위 1659~1674) 하면 별로 떠오르는 기억이 없다. 조선의 왕 중에서도 존재감이 없는 경우는 대개 재위 기간이 매우 짧은 경우이다. 2대 정종을 비롯하여, 8대 예종, 12대 왕 인종 등은 재위 기간이 1~2년 밖에 되지 않아, 큰 업적을 낼 형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현종은 재위 기간이 짧은 것도 아니었다. 15년이나 재위하여 세조나 연산군, 효종보다도 재위 기간이 긴 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종이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한 것은 개인적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던 점, 유래 없는 자연재해와 대기근으로 제대로 정사를 펼칠 수 없었다는 점, 그리고 당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이를 수습하는데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 등을 지적할 수 있다. 현종 시대 활약한 인물로, 왕보다 지명도가 훨씬 높은 인물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09)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종이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한 것은 개인적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던 점, 유래 없는 자연재해와 대기근으로 제대로 정사를 펼칠 수 없었다는 점, 그리고 당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이를 수습하는데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 등을 지적할 수 있다. 현종 시대 활약한 인물로, 왕보다 지명도가 훨씬 높은 인물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09)이다.
1. 송시열과 송동(松洞)
현종 즉위년에 전개된 1659년의 기해예송과 재위 마지막 해에 있었던 갑인예송은 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맞섰다. 두 차례의 예송에서 송시열은 서인의 핵심으로 활약했다. 서인이 승리한 기해예송 이후에는 승승장구했지만, 남인이 승리한 갑인예송 이후에는 송시열은 충청도 옥천 구룡촌(九龍村) 외가에서 태어나 26세(1632)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뒤에 회덕(懷德)의 송촌(宋村)·비래동(飛來洞)·소제(蘇堤) 등지로 옮겨 살면서, 세상에서는 송시열을 회덕 사람으로 칭하였다.
숙종 때에는 제자인 윤증(尹拯)과 대립하면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을 때, ‘회니논쟁(懷尼論諍)’이라 한 것도, 송시열의 거처인 회덕과 윤증의 거처인 니산(尼山:논산)을 대표하여 칭한 것이다. 송시열은 청주 화양동 계곡에서 만년을 보냈고, 그를 배향한 화양동 서원도 이곳에 소재할 정도로 충청도와 인연이 깊은 인물이다. 그러나 정치인, 학자로서 서울에서 오랜 기간 활동한 만큼 서울에도 그를 기억하는 공간들이 다수 남아 있다.
먼저 서울에서 그가 살았던 동네인 ‘송동’이 있다. 송시열이 서울에 머물 때 살았던 곳은 동부 숭교방 흥덕동으로, 당시의 성균관 근처이며, 현재의 종로구 명륜동, 혜화동 일대였다. 19세기 학자 유본예(柳本藝)가 쓴 『한경지략(漢京識略)』 명승조(名勝條)에는 “송동(宋洞)이 성균관 동쪽에 있는데 우암 송시열이 살던 동네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송동’ 자체가 송시열의 성을 따서 붙인 이름인 만큼 조선후기까지 지속된 그의 영향력을 잘 보여준다.
현재 혜화동의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 정문에는 우암구기(尤菴舊基)라는 글자가 쓰여 있어 이곳이 송시열의 옛 집터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이곳에서 조금 위로 올라가면 ‘증주벽립(曾朱壁立)’이라는 글씨를 만날 수 있는데, ‘증자와 주자의 뜻을 계승하고 받들겠다.’는 송시열의 의지가 압축되어 있다. 송시열은 1689년 기사환국으로 제주도에 유배를 가게 되는데, 이런 인연으로 제주도에서는 송시열을 모신 서원인 귤림서원을 건립하였다. 귤림서원에도 바위에 ‘증주벽립’을 새겨 놓았는데, 이것은 송동에 있는 것을 탁본한 것이다.
송시열은 네 글자의 바위 글씨와 특히 인연이 깊다. 서울의 도봉산으로 올라가는 관리사무소 아래쪽 바위에는 ‘도봉동문(道峯洞門)’이라는 글씨가 있는데, 송시열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도봉동문은 선조 때 조광조를 배향한 도봉서원으로 가는 관문이기도 했다. 숙종 때에는 도봉서원에 송시열을 추가로 배향하였으니, ‘도봉동문’ 네 글자는 송시열 자신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숙종 때에는 제자인 윤증(尹拯)과 대립하면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을 때, ‘회니논쟁(懷尼論諍)’이라 한 것도, 송시열의 거처인 회덕과 윤증의 거처인 니산(尼山:논산)을 대표하여 칭한 것이다. 송시열은 청주 화양동 계곡에서 만년을 보냈고, 그를 배향한 화양동 서원도 이곳에 소재할 정도로 충청도와 인연이 깊은 인물이다. 그러나 정치인, 학자로서 서울에서 오랜 기간 활동한 만큼 서울에도 그를 기억하는 공간들이 다수 남아 있다.
먼저 서울에서 그가 살았던 동네인 ‘송동’이 있다. 송시열이 서울에 머물 때 살았던 곳은 동부 숭교방 흥덕동으로, 당시의 성균관 근처이며, 현재의 종로구 명륜동, 혜화동 일대였다. 19세기 학자 유본예(柳本藝)가 쓴 『한경지략(漢京識略)』 명승조(名勝條)에는 “송동(宋洞)이 성균관 동쪽에 있는데 우암 송시열이 살던 동네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송동’ 자체가 송시열의 성을 따서 붙인 이름인 만큼 조선후기까지 지속된 그의 영향력을 잘 보여준다.
현재 혜화동의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 정문에는 우암구기(尤菴舊基)라는 글자가 쓰여 있어 이곳이 송시열의 옛 집터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이곳에서 조금 위로 올라가면 ‘증주벽립(曾朱壁立)’이라는 글씨를 만날 수 있는데, ‘증자와 주자의 뜻을 계승하고 받들겠다.’는 송시열의 의지가 압축되어 있다. 송시열은 1689년 기사환국으로 제주도에 유배를 가게 되는데, 이런 인연으로 제주도에서는 송시열을 모신 서원인 귤림서원을 건립하였다. 귤림서원에도 바위에 ‘증주벽립’을 새겨 놓았는데, 이것은 송동에 있는 것을 탁본한 것이다.
송시열은 네 글자의 바위 글씨와 특히 인연이 깊다. 서울의 도봉산으로 올라가는 관리사무소 아래쪽 바위에는 ‘도봉동문(道峯洞門)’이라는 글씨가 있는데, 송시열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도봉동문은 선조 때 조광조를 배향한 도봉서원으로 가는 관문이기도 했다. 숙종 때에는 도봉서원에 송시열을 추가로 배향하였으니, ‘도봉동문’ 네 글자는 송시열 자신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 주택 바위에 새긴 ‘백세청풍’ 글씨
2. 대명의리론이 구현된 공간들
송시열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 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잊지 말자는 취지의 ‘대명의리론(大明義理論)’을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안동 김씨 김상용의 별서인 청풍계에는 명에 대한 영원한 충성을 다짐하는 ‘大明日月 百世淸風’ 여덟 글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는 “청풍계가 인왕산 기슭에 있는데 그 골 안이 깊고 그윽하며 천석(泉石)이 아늑하고 아름다워서 놀며 즐길만하다. 김상용의 집 안에 태고정(太古亭)이 있고, 늠연당(凜然堂)이 있어 선원(仙源:김상용의 호)의 초상화를 모시었다. 후손들이 근처에 살고 있어서 세상 사람들이 창의동 김씨라 한다. 시냇물 위 바위에 ‘대명일월 백세청풍’ 여덟 자가 새겨져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덟 자 모두 송시열의 글씨라는 견해와, ‘백세청풍’은 주희의 글씨, ‘대명일월’은 주희의 글씨라는 견해가 함께 전한다. 바위에 새긴 글씨는 명나라에 대한 조선의 영원한 충성을 다짐하는 대표적인 상징물이었다.
조선후기의 대저택 청풍계의 모습은 겸재 정선(鄭敾)의 그림 ‘청풍계(淸風溪)’에 잘 묘사되어 있다. 청풍계는 ‘맑은 바람이 부는 계곡’ 이란 의미로 인왕산 기슭의 골짜기인 현재 종로구 청운동 일대를 말한다. 안동 김씨 김상용의 후손인 김창협과 김창흡이 영조 대에 정선을 적극 후원을 해 준 만큼 그들의 저택을 그린 ‘청풍계’ 는 정선의 그림 중에서도 최고의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청풍계 바로 위쪽에는 대기업의 대표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집이 들어서기도 했는데 이곳이 명당임을 진작에 알았을까? 현재 청운초등학교를 지나 왼쪽으로 조금 올라가서 어느 주택에 바위에 새겨져 있는 ‘백세청풍’의 글씨에서 청풍계의 흔적을 만날 수가 있다. 원래 여덟 글자였는데, 이곳에 주택을 지으면서 ‘대명일월’ 네 글씨는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송시열이 강조한 대명의리론(大明義理論)은 숙종 때에는 창덕궁 후원에 대보단(大報壇)을 건립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대보단의 설립은 1704년(숙종 30) 1월 숙종이 제의했고 이어서 관학 유생 160명이 명나라 신종(神宗:만력제)의 사당 건립을 청원했다. 숙종은 그해 3월, 후원의 정결한 곳에서 먼저 의종(毅宗)에게 제사를 올렸다. 대보단 건립 공사는 10월에 시작되어 11월에 단의 이름을 짓고, 12월 21일에 완료되었다. 『숙종실록』은 “대보단이 준공되었는데, 단(壇)은 창덕궁 금원(禁苑)의 서쪽 요금문(曜金門) 밖 옛날 별대영(別隊營)의 터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보단이 설립된 후 숙종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군사를 보내 준 신종을 위한 제사를 지냈는데, 영조 대인 1749년(영조 25) 3월에는 명나라 태조(太祖)와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태조는 황조(皇朝)의 시작이고 의종은 황조의 마지막이며, 신종은 중간으로 우리나라에 큰 은혜가 있으니 세 황제를 함께 제향한다면 존주(尊周)의 의리에 더욱 광채가 있을 것입니다.”라는 논리였다. 이어서 “선정신(先正臣) 송시열이 이 소식을 들었다면 반드시 힘껏 찬동하기에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라면서, 송시열의 대명의리론을 다시금 소환하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1820년대에 창덕궁과 창경궁의 모습을 그린 동궐도(東闕圖)의 서쪽 윗부분에는 대보단이 그려져 있는데, 실제 모습보다도 더 크게 표현하고 있다. 당시까지도 대명의리론이 조선사회에 강하게 구현되었음을 볼 수 있는 지표이다.
조선후기의 대저택 청풍계의 모습은 겸재 정선(鄭敾)의 그림 ‘청풍계(淸風溪)’에 잘 묘사되어 있다. 청풍계는 ‘맑은 바람이 부는 계곡’ 이란 의미로 인왕산 기슭의 골짜기인 현재 종로구 청운동 일대를 말한다. 안동 김씨 김상용의 후손인 김창협과 김창흡이 영조 대에 정선을 적극 후원을 해 준 만큼 그들의 저택을 그린 ‘청풍계’ 는 정선의 그림 중에서도 최고의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청풍계 바로 위쪽에는 대기업의 대표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집이 들어서기도 했는데 이곳이 명당임을 진작에 알았을까? 현재 청운초등학교를 지나 왼쪽으로 조금 올라가서 어느 주택에 바위에 새겨져 있는 ‘백세청풍’의 글씨에서 청풍계의 흔적을 만날 수가 있다. 원래 여덟 글자였는데, 이곳에 주택을 지으면서 ‘대명일월’ 네 글씨는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송시열이 강조한 대명의리론(大明義理論)은 숙종 때에는 창덕궁 후원에 대보단(大報壇)을 건립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대보단의 설립은 1704년(숙종 30) 1월 숙종이 제의했고 이어서 관학 유생 160명이 명나라 신종(神宗:만력제)의 사당 건립을 청원했다. 숙종은 그해 3월, 후원의 정결한 곳에서 먼저 의종(毅宗)에게 제사를 올렸다. 대보단 건립 공사는 10월에 시작되어 11월에 단의 이름을 짓고, 12월 21일에 완료되었다. 『숙종실록』은 “대보단이 준공되었는데, 단(壇)은 창덕궁 금원(禁苑)의 서쪽 요금문(曜金門) 밖 옛날 별대영(別隊營)의 터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보단이 설립된 후 숙종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군사를 보내 준 신종을 위한 제사를 지냈는데, 영조 대인 1749년(영조 25) 3월에는 명나라 태조(太祖)와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태조는 황조(皇朝)의 시작이고 의종은 황조의 마지막이며, 신종은 중간으로 우리나라에 큰 은혜가 있으니 세 황제를 함께 제향한다면 존주(尊周)의 의리에 더욱 광채가 있을 것입니다.”라는 논리였다. 이어서 “선정신(先正臣) 송시열이 이 소식을 들었다면 반드시 힘껏 찬동하기에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라면서, 송시열의 대명의리론을 다시금 소환하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1820년대에 창덕궁과 창경궁의 모습을 그린 동궐도(東闕圖)의 서쪽 윗부분에는 대보단이 그려져 있는데, 실제 모습보다도 더 크게 표현하고 있다. 당시까지도 대명의리론이 조선사회에 강하게 구현되었음을 볼 수 있는 지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