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23) 북한산성에도 행궁이 있었다
행궁(行宮)은 왕이 임시로 거처하는 궁궐로서, 행궁하면 왕실의 휴식 공산으로 활용된 온양 행궁, 병자호란 대 인조가 피난처로 삼았던 남한산성 행궁, 정조가 화성을 건설하고 이곳에 행차하면 머물렀던 화성(華城) 행궁을 떠올리게 된다.
이외에도 왕의 행차 길에 행궁이 설치되었다. 화성 행차 때에는 시흥과 사근참 등지에 행궁을 설치했고, 여주 영릉 행차에는 이천부에 행궁을 설치하기도 했다. 그런데 북한산성 안에도 행궁이 있었던 사실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북한산성을 새롭게 수축한 숙종은 산성 내에 행궁을 설치했다. 그만큼 방어처로서 북한산성의 가치를 높게 인식했던 것이다.
온양 행궁과 남한산성 행궁
현대인들도 즐겨 찾는 온천은 조선시대 왕실의 최고 휴식처였다. 조선 초기에는 황해도 평산과 경기도 이천 온천도 자주 이용되었지만, 평산 온천은 너무 뜨겁고 이천은 길이 험해 온양온천이 가장 널리 사랑받았다.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온양 행궁을 자주 찾았던 왕은 세종, 세조, 현종, 숙종, 영조 등이고, 사도세자도 온양 온천을 찾았음이 기록되어 있다. 왕들이 온양온천을 자주 찾으면서 이곳에는 임시 궁궐인 행궁이 설치되었다. 온양 행궁은 1432년 세종 대에 건립을 명받았고 이듬해 1월 6일에 완성되었다. 세조 대에는 온양 행궁에 관리인을 두었다. 기록에는 세조가 “무릇 온양온천에서 목욕하고자 하는 자는 어정(御井)과 어실(御室) 외에는 금하지 말라”고 하여, 백성들도 온양온천을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한 모습이 나타난 있다.
온양 행궁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불에 타 폐허가 되었다. 이를 다시 재건한 왕이 바로 현종이다. 현종은 지병을 다스리기 위해 온양 행차를 결심하고 행궁의 복구를 명했다. 이로써 어실과 탕실, 각종 부속 건물 등 약 100여 칸 규모의 건물이 복구되었다. 현종은 온양 행궁을 가장 많이 찾은 왕이기도 하다. 재임 기간 내내 종기와 피부병에 시달렸던 현종은 온천을 자주 찾았다. 1665년(현종 6)부터 1669년(현종 10) 사이 실록 기록에는 왕이 온천에 머문 기사가 매년 50건이나 발견될 정도다.
현종은 백성들에게 폐가 될 것을 걱정하면서도 온천욕의 뛰어난 효능 때문에 계속 온양으로 갔다. 1662년(현종 3) 8월 13일의 “내 몸의 습창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으니 온정에 가서 목욕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하다.”라는 『현종실록』의 기록은 온천매니아 왕 현종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남한산성 행궁은 1625년 이서(李曙)의 제안으로 완성한 건물로, 왕이 유사시에 머물기 위해 설치한 임시 궁궐이었다. 행궁 정문의 누각은 한남루(漢南樓)이며, 왕의 생활 공간인 상궐(上闕) 73칸과 집무 공간인 하궐(下闕) 154칸 등 총 227칸으로 이루어졌다. 상궐에는 왕의 거처였던 내행전(內行殿)과 시중을 받드는 나인들과 호위하는 무사들의 거처인 남행각과 북행각이 있다. 하궐에는 왕이 신하와 함께 업무를 보는 외행전(外行殿)이 있고, 남·북행각이 있었다. 병자호란 때는 행궁을 향해 청나라 군대개 홍이포(紅夷砲)를 쏘는 아찔한 상황도 있었다.
남한산성 행궁에는 궁궐의 종묘에 해당하는 좌전(左殿)과 사직단에 해당하는 우실(右室)을 둔 것도 주목이 된다. 유사시에 이곳에서 종묘와 사직을 지키려는 뜻이 담긴 것이다. 남한산성 행궁은 2002년부터 복원을 시작해 2012년 5월 복원을 마무리하였다. 남한산성은 201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행궁의 원형 복원이 큰 힘이 되었다. 남한산성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남한지(南漢志)』에는 인조 이후에도 숙종, 영조, 정조 등이 이곳을 찾았음이 보인다. 이들 왕들은 이곳에 머물면서 병자호란의 치욕을 반드시 씻을 것을 다짐했을 것이다.
북한산성 행궁의 설치
북한산성을 수축한 숙종은 산성 내에 행궁을 설치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행궁이 완성되었음은 1712년(숙종 38) 6월 9일 “북한산성의 행궁의 영건당상(營建堂上) 이하를 모두 써서 들이라고 명하고 상을 내렸는데 차등이 있었다.”는 『숙종실록』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앞서 1710년 10월 민진후는 “대개 북한산에 성을 쌓는 계책은 드는 비용이 비록 많다 하더라도, 행궁(行宮)과 창고를 반드시 아울러 설치하여야 합니다.”라는 논의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행궁은 동장대 맞은편 북한산 상원봉 아래에 위치했다. 숙종은 행궁 영건청을 설치하여 호조판서와 공조판서로 하여금 물력을 마련하라고 지시했으며, 남한산성의 행궁 형태를 따르되 바람이 세차므로 약간 낮게 짓도록 하였다. 1711년(숙종 37) 7월 13일에는 숙종의 명을 받은 조태구(趙泰耉), 김우항(金宇杭) 등이 지사(地師:지관)를 거느리고 행궁의 터를 살펴보게 하였다. 지사들이 모두 상원암(上元菴)의 새로 정한 곳이 완전하고 좋다고 하므로 조태구 등이 돌아와 숙종에게 행궁을 축조할 장소로 보고하였다. 숙종의 적극적인 의지 속에 추진된 행궁 건설은 내전 28칸, 내전 행각 15칸, 수라간 6칸, 변소 3칸, 내문 3칸, 외전 28칸, 외전 행각 18칸, 중문 3칸, 월랑 20칸, 외문 4칸, 산정문(山亭門) 1칸의 규모로 그 완성을 보았다.
숙종에 이어 북한산성 행궁을 찾은 왕은 영조였다. “임금이 북한산성의 행궁에 나아가 시단봉(柴丹峰)에 올랐다가, 날이 저물어 환궁하였다. 북한산성은 도성의 북쪽에 있는데 산이 높고 험준하고 가팔라서 성궁(城宮)을 쌓아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게 했었다. 옛날 임진년(1712) 4월에 우리 숙묘(肅廟:숙종)께서 어가를 타고 임어하여 친히 살펴보신 적이 있었는데, 이날 거둥한 것은 추모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는 1772년(영조 48) 4월 10일의 『영조실록』의 기록에서는 영조가 북한산성 행궁을 찾아 부친인 숙종을 추모했음이 나타난다.
정약용은 ‘망행궁(望行宮:행궁을 바라보며)’이라 제목을 단 시에서, “묘당에서 짜낸 지혜 치밀하였고 / 백성들 불평없이 부역 응했네 / 올라보니 가슴에 감개무량해 / 저녁종 울릴 때까지 홀로 서 있네” 라 하여 북한산성 행궁을 바라보는 감회를 표현하였다.
북한산성 행궁은 일제강점 이후 쇠락을 걷다가 본격적인 지표 조사가 이루어진 1999년 전까지 거의 폐허로 방치되어 있었다. 지표 조사 결과 내전 지역에 기단석과 계단, 주춧돌 등이 뚜렷이 남아있음이 확인되었다. 2007년에는 사적 제479호로 지정되었다. 1900년대에 행궁을 촬영한 사진도 전해오고 있어, 행궁의 원형 복원에 활용될 것으로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