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현궁에서 맞이하는 작은 설, 동지' 행사장에서 시민들에게 팥죽을 나눠주고 있다. ⓒ윤혜숙
12월 22일은 '동지(冬至)'이다. 동지는 24절기 중 22번째에 해당하는 절기다. 일 년 중에서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동지를 지나면서 낮이 점차 길어지고 밤이 짧아진다. 그러다 하지가 되면 낮이 가장 길고 밤이 가장 짧아진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탓에 계절이 바뀌고, 낮과 밤의 길이가 달라지는 현상이 해마다 되풀이된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동지를 '작은 설'이라고 해서 “동지에 팥죽을 먹어야 나이가 한 살 더 먹는다.”고 했다. 팥죽은 찹쌀로 경단을 빚은 후 팥을 고아 만든 죽에 넣고 끓여서 만든다. 이때 경단은 동그랗게 새알만 한 크기로 만들기 때문에 '새알심'이라고 불린다. 오래전부터 우리 조상들은 동지에 팥죽을 먹는 풍습이 있었다. 팥죽의 붉은색은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전염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동지에 새알심이 든 팥죽을 끓여 먹었다. ⓒ윤혜숙
어릴 적 기자의 어머니는 설, 추석 명절 때처럼 동짓날에도 부엌에서 바쁘게 시간을 보내셨다. 찹쌀가루를 물로 반죽해 정성들여 새알심을 빚고, 팥을 고아 만든 죽에 새알심을 넣고 끓이셨다. 매년 12월 22일 동지에 맞춰서 어머니가 끓여주신 팥죽을 먹으면서 동지의 뜻을 되새겨봤다. 그런데 정작 기자는 일과가 바쁘다는 핑계를 위안 삼아 동지에 팥죽을 만들어 먹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기자는 뜻밖의 즐거움과 맞닥뜨릴 수 있었다.
사물놀이패가 운현궁에서 새해 복 맞이 판굿을 벌이고 있다. ⓒ윤혜숙
12월 22일 오후 2시 운현궁 앞을 지나는데 문 앞에 사물놀이패가 있었다. 새해를 맞이해 액운을 방지하고 행복을 기원하는 풍물과 액막이 타령을 하고 있었다. 운현궁 문 앞에서 시작된 공연이 운현궁 안쪽 마당에서 계속됐다. 운현궁 마당은 며칠 전 내렸던 눈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은 눈이 치워져 있었지만, 곳곳에 눈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단단하게 뭉쳐진 눈사람도 있었다.
운현궁은 조선시대 임금이었던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거주했던 집이다. ⓒ윤혜숙
장갑을 끼지 않으면 손이 시릴 정도로 날씨가 춥다. 하지만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운현궁 담벼락 너머로 울려 퍼지는 사물놀이패의 공연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공연이 끝나자 시민들은 운현궁에서 마련한 동짓날 행사를 체험해 보거나 삼삼오오 운현궁 내부를 둘러보기도 했다.
운현궁까지 와서 운현궁 내부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법이다. 운현궁은 조선시대 임금이었던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집이다. 지금 남아 있는 집의 규모로 봐선 당시 흥선대원군의 권세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 천하를 호령했던 흥선대원군의 권력도 한때에 불과했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日紅 權不十年)'이라는 말처럼 아무리 높은 권세를 가진 자라도 오랜 세월을 지속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수십 년에 불과하다. 운현궁에서 지나간 역사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면서 새삼 우리네 인생의 무상함을 느껴본다.
아이들이 우리 민족의 전통놀이인 활쏘기, 제기차기, 투호를 즐기고 있다. ⓒ윤혜숙
전통놀이마당에서 활쏘기, 제기차기, 투호를 할 수 있었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3명의 아이가 추운 줄도 모르고 전통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심지어 장갑도 끼지 않았다. 아이들은 활을 쏘다가 제기를 차다가 또 투호를 한다. 가까이 가서 아이들에게 물어봤다. 인근 운현초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었다. 하굣길에 사물놀이패의 소리를 듣고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사물놀이 공연을 구경하는 것도 신나지만, 우리의 전통 놀이도 체험해 보고 싶었어요.”라면서 “활쏘기와 투호가 재미있어요. 제기차기는 헛발질만 해서 보기보다 어려워요.”라고 답한다.
운현궁 직원들이 시민들에게 동지 팥죽을 나눠주고 있다. ⓒ윤혜숙
직원이 시민들에게 팥죽을 나눠주고 있었다. 팥죽 나눔은 오전 11시 40분부터 시작해서 선착순이었다. 기자도 팥죽을 받았다. 지금 당장 먹을 수 없어서 아쉽긴 했지만, 해를 거르지 않고 동지팥죽을 먹을 수 있으니 더없이 반가웠다. 집에 가져가서 가족들과 나눠 먹겠다고 하니 직원이 여러 개의 팥죽을 챙겨줬다.
뱀 '사(蛇)' 한자를 문에 거꾸로 붙이면 액운이 달아난다며 부적을 찍는 체험도 있었다. ⓒ윤혜숙
부적도 찍어보았다. 부적은 잡귀를 쫓고 재앙을 물리치기 위해 붉은색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몸에 지니거나 집에 붙이는 종이를 뜻한다. 직원이 “뱀 '사(蛇)' 한자를 거꾸로 써서 문에 붙이면 액운이 달아난다는 풍습이 전해져 오고 있어서 준비했어요.”라고 말했다. 기자도 액운을 몰아내기 위해 손바닥에 힘을 주고 눌러서 부적을 찍었다. 가방에 부적을 챙겨 넣으니 심리적인 위안이긴 해도 기자의 마음이 든든해졌다. 올 한 해 기자를 비롯한 온 가족이 건강하고 무탈하게 지내올 수 있었던 것 만으로도 다행이고 감사하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그러하기를 기원해본다.
'동지헌말'의 풍습을 재현한 '한지 팥버선 열쇠고리 만들기'를 체험하는 시민들이 많았다. ⓒ윤혜숙
동지의 세시풍속으로 '동지헌말'이 있다. 동지헌말은 '수명장수'의 뜻을 담아 며느리들이 시부모에게 버선을 지어드리던 풍습이다. 동지헌말에 착안해 운현궁에서는 팥으로 속을 채운 '한지 버선 열쇠고리'를 만드는 체험을 준비했다. 손이 시린 데도 테이블에 둘러앉은 시민들은 열심히 열쇠고리를 만들었다.
과거의 방식대로 전통 한지와 엽전을 이용해서 직접 제기를 만들어보는 체험도 있었다. ⓒ윤혜숙
전통 한지와 엽전을 이용해서 직접 제기를 만들어보는 체험도 있었다. 과거의 방식을 재현하고 있다. 구멍 뚫린 엽전이나 동전을 비단이나 한지로 접어 싼 다음, 양 끝을 구멍에 꿰고 그 한지의 끝을 여러 갈래로 찢어 술을 너풀거리게 해서 제기를 만들었다. 지금과는 달리 과거에는 아이 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제기를 차면서 놀았다.
제기를 만든 어르신이 기자에게 제기를 차는 시범을 보여줬다. 제기를 차려면 한쪽 발로 온몸을 지탱하면서 나머지 발로 허공에 뜬 제기를 차야 한다. 이때 발로 찬 제기가 땅바닥에 떨어지면 안 된다. 어르신은 “제기를 여러 번 차는 게 쉽지 않아. 몸이 예전과 다르네.”라면서 멋쩍게 웃으신다. 그래도 잠시나마 제기를 차면서 어릴 적 추억에 잠길 수 있었으니 그것으로도 충분하다고 하신다.
시민이 직접 만든 제기와 열쇠고리를 보여주고 있다. ⓒ윤혜숙
열쇠고리와 제기를 만든 시민은 “어릴 적부터 동지에 팥죽만 먹었고 이런 체험은 처음이에요. 이번에 동지헌말이 우리의 전통 풍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악귀를 쫓는 팥을 넣어서 한지로 버선을 만들어보는 아이디어가 정말 좋네요.”라고 말한다. 그는 “운현궁에서 동지를 맞아 우리의 전통 풍속을 체험하는 행사를 마련했는데, 영하의 기온에 너무 춥다 보니 정작 많은 시민이 참여하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쉬워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운현궁 마당에서 다가오는 새해의 행복을 기원하며 신명나는 공연이 벌어졌다. ⓒ윤혜숙
운현궁 나들이에 나선 시민들은 운현궁도 구경하고 동짓날 풍습을 체험할 수 있었다. 아마도 서울 시내 곳곳에서 시민들을 위한 동짓날 행사가 많이 마련돼 있었을 것이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간 강추위에 외출하는 게 쉽지 않다. 하지만 두꺼운 외투로 중무장하고 집 밖을 나선다면 기자가 그러했듯이 뜻밖의 즐길 거리와 마주할 수 있으리라.
운현궁
○ 주소 : 서울시 종로구 삼일대로 464
○ 교통: 지하철 3호선 안국역 4번 출구
○ 운영일시 : 화~일요일 09:00~18:00(매주 월요일 정기휴무)
○ 운현궁 누리집
○ 문의 : 02-766-90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