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는 3월 16일부터 18일까지 3일간 광화문 월대 및 주변부 발굴조사 현장을 공개했다. 일제강점기 때 광화
문 앞 월대(궁궐 등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 형식의 대) 등을 훼손하고 설치했던 전차 철로의 모습을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서울시는 문화재청과 함께 광화문광장 재조성사업부지 내 유적 정밀발굴조사를 진행 중이다. 이를 통해 광화문
월대 복원 및 삼군부(예조)와 의정부 영역인 주변부 정비를 병행하고 있다.
이번 시민 공개 행사는 사전에 서울시 공공서비스 예약 누리집에서 ‘광화문 월대 및 주변부 고고학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참여 신청을 받았으며, 접수 시작 5분 만에 매진되는 등 상당한 관심을 받았다. ☞ [관련 기사] 광화문
'광화문 월대 및 주변부 고고학 이야기' 프로그램에 참여 중인 시민들 ©조수연
3월 18일, 광화문 역사광장 내 발굴조사 현장 시민 공개 및 해설 프로그램 ‘광화문 월대 및 주변부 고고학 이야기’
행사에 동행했다. 이 날 해설은 서울시립대학교 신희권 교수가 맡았다. 고고학자 신희권 교수는 과거 문화재청
때 광화문 복원 책임 소장으로 재직한 바 있으며, 전공은 한양도성, 백제도성 등으로 국내 도성 권위자 중 한 명
이다.
먼저 신희권 교수는 '광화문광장'이라는 이름에 담긴 ‘광장’의 개념을 설명했다. 본래 광장은 서양에서 도입된 개
념으로 동양에서는 광장 대신 ‘길’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조선시대 때 광화문광장은 ‘길’이라는 뜻이 담긴 ‘육조
거리’로 불렸다. 여기서 육조란 오늘날 행정기관인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를 뜻하며, 행정부 최고 기관
인 ‘의정부’와 군을 관리하던 ‘삼군부’가 존재했다.
당시 육조거리는 너비 50m 내외, 길이는 500m 내외로 10:1의 비율을 보였다. 현재 넓은 사람길로 변한 광화문
광장에 대해 신희권 교수는 “과거 광장을 두고 양옆에 찻길이 있어 세계 최대의 ‘중앙분리대’라는 오명을 쓴 적
이 있다”며 “현재는 과거 육조거리처럼 사람길로 변했다”고 전했다.
‘광화문 월대 및 주변부 고고학 이야기’의 해설을 맡은 서울시립대학교 신희권 교수 ©조수연
이어서 신희권 교수는 조선 건국 후 ‘한양도성’의 형성 과정을 설명했다. 유교가 중심인 조선은 한양도성을 계획
할 때도 철저히 유교 이념을 따랐다. 1392년 건국된 조선은 1394년까지 2년 동안 풍수지리에 입각한 ‘명당’을 찾
았는데, 명당으로 현재의 광화문 일대를 선점했다. 이후 신하들은 위패를 봉양하는 종묘와 사직을 놓고, 임금의
거처인 궁궐을 지어 왕의 근엄함을 보이고, 궁을 지키기 위해 도성이라고 하는 성곽을 지을 것을 말했고, 태조 이
성계는 이에 한양도성을 지었다.
신희권 교수는 유교 사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국가는 중국의 ‘주나라’라며 당시 조선은 주나라 예법인 ‘주례’에 의
거해 두 가지 원칙으로 한양도성을 설계했다고 밝혔다. 첫째, 임금의 왼쪽에는 종묘를, 오른쪽에는 사직단을 놓
았다. 이를 '좌묘우사(左廟右社)'라고 한다.
둘째, 앞에 관청을 두고 뒤에 시장을 두었다. 따라서 광화문을 기점으로 경복궁 앞에 육조와 삼군부, 의정부, 한성
부 등 관청이 있는 셈이다. 다만 궁궐 뒤에 시장을 두지 않았고, 현재 종로 일대에 ‘시전’이라는 시장을 두었다. 그
이유에 대해 신희권 교수는 “한양 설계의 기준인 북악산이 경복궁 뒤에 있다”며 “산에 시장을 놓을 수 없으니 종
로 일대에 시전을 형성하게 한 것”이라고 전했다.
조선시대 국가 정사를 총괄하던 의정부 터 ©조수연
이후 월대 정밀발굴조사 현장으로 이동했다. 안전을 위해 모두 안전모를 착용했으며, 발굴 도중 드러난 전차 노
선부터 살펴봤다. 이 전차 노선은 일제가 조선 통치 20주년을 기념한 1929년 조선박람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물자와 인력 수송을 원활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1923년 개통한 노선이다. 1929년 조선박람회의 정문으로 광화문
을 사용해 지금의 자리에 있던 광화문은 삼청동 방향으로 헐려 나갔다.
시민에게 공개된 일제강점기 때 설치한 전차 노선 ©조수연
전차 노선은 Y자 모양으로 나 있는데, 한쪽은 서쪽 통의동 쪽으로, 또 다른 한쪽은 안국동 쪽으로 향한 노선이다.
광화문에서 전차 노선이 교차하는 셈인데, 일제가 광화문 월대를 헐고 전차 노선을 부설했던 이유는 조선의 심
장부를 관통하면서 조선 왕실의 흔적을 뭉개고 일제와 일본인의 편의를 위해서였다. 이 전차 노선은 광복 후에
도 사용되다가 1966년, 세종로지하도 건립 공사 때 땅속에 묻히게 된다. 이후 광화문 복원 사업으로 57년 만에
시민에게 공개된 셈이다.
전차 노선이 부설되면서 광화문 앞 돌로 만든 평평한 기단 위에 난간이 양쪽에 놓인 월대가 훼손됐고, 폭 29.7m
의 월대 중앙부로 왕이 다니던 폭 7m의 어도는 허리가 잘려 나간 모습이 됐다.
월대는 궁궐의 정전(正殿), 묘단, 향교 등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 형식의 대(臺)로, 19세기 흥선대원
군에 의한 경복궁 중건 과정에서 탄생했다. 고종 때 중건된 경복궁에는 정문인 광화문 전면에 월대를 배치했고,
월대를 중심으로 서측에 삼군부, 동측에 의정부를 두었다.
이처럼 일제는 문무의 최고 통치 기구를 비롯해 조선 왕실의 모습을 상당수 훼손했다.
월대 중앙부로 왕이 다니던 폭 7m의 어도는 허리가 잘려나간 모습이 됐다. ©조수연
그 외에 삼군부와 의정부 흔적도 확인할 수 있었다. 삼군부·의정부 외행랑(도로와 접하는 건물면) 흔적과 옛 우물
가, 일제강점기에 놓인 상·하수도 배관 등도 볼 수 있었는데, 특히 청소년들에게 역사와 문화재 보존의 중요성을
알려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뜻깊은 행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