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은 건청궁을 왕으로서의 위상을 강화하는 공간으로 활용했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48) 경복궁의 뒤뜰
경복궁에서도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 있다. 건청궁(乾淸宮)과 집옥재(集玉齋)는 경복궁 후원에서
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있기 때문에 가기 쉽지 않다. 고종이 독립된 공간으로 설치한 건청궁과 근대의 길로 갈 것
을 모색한 집옥재, 그리고 건청궁과 연결되는 정자 향원정(香遠亭)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궁궐 속의 궁궐, 건청궁
1865년 조대비의 하교로부터 시작한 경복궁 중건 사업은 1868년 7월 일단 그 완성을 보았다. 고종은 대왕대비
신정왕후, 왕비 명성왕후 등과 함께 거처를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옮기면서 경복궁 시대의 시작을 다시 알렸다.
경복궁 중건 사업의 실질적 지휘자였던 흥선대원군이 1873년 하야하면서 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다. 이
경복궁 중건 사업의 실질적 지휘자였던 흥선대원군이 1873년 하야하면서 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다. 이
무렵 고종이 새로운 건물 하나를 완성하였으니, 이곳이 바로 궁궐 속의 궁궐 건청궁이다. 건청궁의 공사는 궁궐
의 내탕금으로 비밀리에 진행되었는데, 건립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를 반대하는 상소문이 올라왔다.
건청궁 건립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를 반대하는 상소문이 올라오기도 했다.
부호군(副護軍) 강진규(姜晉奎)는 “삼가 듣건대, 건청궁을 짓는 역사(役事)가 몹시 웅장하고 화려하다고 합니
다. 이곳은 행차할 때 임시로 거처하는 장소에 지나지 않는데, 그토록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어서 어디다 쓴다
고 지나치게 경비를 허비하는 것입니까? 게다가 창고가 화재를 입어 한창 수선하고 있는 데 다시 이렇게 정도
에 지나친 큰 공사를 한다면 백성들은 거듭 시달림을 받게 되고 나라의 저축은 더욱 모자라게 될 것이니 밝고
검박한 성상의 덕에 손상을 주는 것이 작지 않을 것입니다.” 면서, 건청궁 공사 중지를 건의하였다.
고종은 가납(嘉納:아름답게 받아들임)한다고 하였지만, 역대 왕의 초상화를 봉안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뜻을
고종은 가납(嘉納:아름답게 받아들임)한다고 하였지만, 역대 왕의 초상화를 봉안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미 어진을 봉안하는 장소가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건청궁 건립은 고종 스스로가 새로운 모색
을 할 공간의 필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1875년 10월에는 수정전(修政殿)에 모신 어진과 교명, 책보를 건청
궁 관문당(觀文堂)에 옮겨 봉안할 것을 지시하면서 건청궁의 위상을 높였다.
건청궁의 사랑채인 장안당(長安堂)은 고종이 주로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