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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살아서도 죽어서도 편치 못한 장희빈의 아들 '경종'

  • 등록일 2022-07-06
  • 작성자 관리자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경종의 어머니이자 숙종의 후궁인 희빈 장씨의 사당인 '대빈궁'
경종의 어머니이자 숙종의 후궁인 희빈 장씨의 사당인 '대빈궁'


조선의 20대 왕 ‘경종(景宗:1688~1724, 재위 1720~1724)’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미지는 장희빈의 아들, 그리고 숙종과 영조 사이에 끼어있는 별다른 존재감이 없는 왕의 모습일 것이다. 실제 경종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장희빈이 굴레는 너무나 컸고, 실제 위기도 많았다. 


1720년 어려움 속에서 숙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경종은 왕으로서의 위상과 권위 회복이 큰 과제였다. 특히나 숙종 말년부터 본격화된 노론과 소론의 당쟁에서 왕의 존재감을 보이는 것이 필요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경종은 생모인 장희빈의 추숭 작업에 착수했다.

장희빈을 모시 사당, 대빈궁


경종 이전에도 왕비로 인정을 받지 못한 생모를 추숭하는 일은 흔히 있었다. 연산군은 재위 중에 생모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숭했고, 광해군은 생모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숭했다. 그러나 제헌왕후나 공성왕후가 왕비의 지위에 있던 시간은 극히 짧았다. 연산군과 광해군이 반정으로 인하여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당연히 쫓겨난 왕의 생모는 왕비의 지위를 바로 박탈당했다. 제헌왕후는 폐비 윤씨로, 무덤은 회릉(懷陵)에서 회묘(懷墓)로 강등되었다. 현재 경희대 일대를 회기동이라 부르는 것은 원래 이곳에 회묘가 있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의 생모 공성왕후 역시 공빈 김씨로 강등되었다. 인조의 경우에는 생모인 구씨를 인헌왕후(仁獻王后)로 높였고, 인헌왕후는 왕비의 자리에 있지 않았지만 지금도 인헌왕후로 불리면서 종묘에 모셔져 있다. 


경종은 재위 3년 만인 1722년 10월 10일 어머니를 추존해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높이고 그 신주를 사우(祠宇)에 모시도록 하였다. 경종의 의지 속에 조성된 사우가 바로 대빈궁(大嬪宮)이다. ‘궁’이라는 명칭은 경복궁, 창덕궁 등 궁궐 이외에도 왕이 되기 전에 머물렀던 잠저(潛邸)나 후궁들의 사당에도 사용했다. 대빈궁은 처음 중부 경행방(慶幸坊:현재의 종로구 낙원동)에 위치해 있었는데, 고종대에 현재의 위치인 칠궁 경역 내로 옮겨졌다. 경종처럼 후궁 소생이었던 영조는 경종이 대빈궁을 세운 것처럼 생모인 숙빈 최씨의 사당을 조성하였는데, 육상궁(毓祥宮)이 그곳이다. 


경종과 영조가 생모를 추숭한 것이 선례가 되어 이후 왕을 낳은 후궁들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 곳곳에 세워졌다. 원종(인조의 생부), 진종(효장세자), 장조(사도세자)처럼 살아서는 왕이 아니었지만 후대에 왕으로 추숭된 이들의 어머니를 모신 사당들이다. 선조의 후궁인 인빈 김씨(원종의 생모)를 모신 저경궁(儲慶宮), 영조의 후궁 정빈 이씨(효장세자의 생모)의 연호궁(延祜宮), 영조의 또 다른 후궁 영빈 이씨(사도세자의 생모)의 선희궁(宣禧宮), 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순조의 생모)의 경우궁(景祐宮)과 함께, 고종의 후궁 귀비 엄씨는 영친왕의 생모였기에 덕안궁(德安宮)이 조성되었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신주가 모셔진 육상궁과 영조의 후궁인 ‘정빈 이씨’의 신주가 모셔진 연호궁은 같은 사당이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신주가 모셔진 육상궁과 영조의 후궁인 ‘정빈 이씨’의 신주가 모셔진 연호궁은 같은 사당이다.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던 왕을 낳은 후궁들의 신주가 육상궁이 있는 공간으로 오게 된 것은 고종 대였다. 1870년 정빈 이씨의 연호궁을 옮긴 것을 시작으로, 1908년 대빈궁과 경우궁, 선희궁, 저경궁이 옮겨졌다. 1908년(순종 1) 7월 23일 『순종실록』에는 “저경궁, 대빈궁, 연호궁, 선희궁, 경우궁에 봉안한 신위는 육상궁 안에 각별히 신주의 방을 만들어 합사하고, 폐궁(廢宮)의 경우 연호궁을 제외하고 모두 국유로 이속시킨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929년에는 귀비 엄씨를 모신 덕안궁까지 옮겨 오면서 총 7개의 사당이 모였다. 칠궁이라는 명칭은 사당이 일곱 개이기 때문이다. 


칠궁은 청와대와 담장을 마주하고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한동안 출입이 제한되었다. 2001년 11월 일반에게 개방되었으나, 청와대 관람코스에 들어 있기 때문에 제한적 관람이 허용되었다. 최근 청와대가 개방되면서 칠궁의 관람도 자유로워졌고, 그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칠궁은 왕을 낳은 후궁 일곱 명을 모신 사당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아들이 왕으로 재위한 경우는 장희빈(경종), 숙빈 최씨(영조), 수빈 박씨(순조) 세 명뿐이다. 나머지는 추존된 왕의 어머니 또는 황태자의 어머니다. 장희빈은 후궁 출신으로 한때 왕비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숙빈이나 수빈에 비해서도 그 위치가 높다. 물론 칠궁의 중심에는 육상궁과 연호궁이 합사되어 있고 서쪽부터 저경궁,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 덕안궁이 서열이 높은 순서로 배치되어 있지만, 대빈궁의 경우 기둥도 둥글고 사당 건물 앞의 계단도 다른 곳보다 하나가 더 많다. 장희빈이 한 때 왕비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를 보인다는 견해도 있다.

의릉 전경
의릉 전경

경종의 승하와 의릉


경종의 무덤이 현재의 서울 성북구 석관동 한국예술종합학교 내에 소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가 않다. 왕으로서의 존재감이 무덤의 존재에도 영향을 미치는 느낌이다. 경종은 1724년 8월 25일 창경궁 환취정(環翠亭)에서 승하하였다. 이에 바로 장례를 담당할 관리들이 임명되었다. 29일 환취정으로부터 경종의 어상(御床)을 받들어 선정전으로 옮기고, 대렴(大斂)을 하여 재궁(梓宮)에 내렸다. 이때 왕세제(王世弟)로 있던 영조와 우의정 이광좌가 상사(喪事)를 주관하였다. 9월 3일에 묘호를 ‘경종(景宗)’으로 정했다. 사려(思慮)를 부지런하고 원대하게 하는 것을 ‘경(景)’이라 하여 정해진 묘호였다. 능호는 ‘의릉(懿陵)’으로 하였다. 


산릉도감에서는 먼저 경종의 세자빈 시절에 승하한 원비(元妃) 단의왕후의 혜릉(惠陵)이 있는 언덕에 능을 쓸 만한 자리가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혜릉은 건원릉 근처에 조성되어 있었는데, 세자빈으로 사망한 부인의 옆에 경종의 무덤을 조성하기에는 부담이 컸다. 계비인 선의왕후도 의식을 해야 했다. 총호사 이광좌는 도감 당상과 풍수지리 전문가인 감여사(堪輿師) 11명을 거느리고 산릉의 길지를 계속 찾았고, 최종적으로 효종의 왕릉이 처음 조성된 구영릉(舊寧陵:현재의 건원릉 서쪽)을 비롯하여, 중량포(中粱浦), 용인, 교하, 왕십리 등 다섯 곳을 선정하였다. 영조는 길지로 선정된 다섯 곳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지관들과 지리에 해박한 사인(士人)들이 중랑포보다 나은 곳이 없다고 건의했고 일단 경종의 산릉 자리는 중량포로 결정되었다. 


12월 16일 경종을 의릉에 장사 지내던 날, 비가 물동이를 뒤집은 것처럼 쏟아졌다고 실록은 전한다. 백관들은 비를 맞으며 겨우 일을 진행하였다. 의릉의 석물은 숙종 명릉의 석물과 제도를 따라 검소하게 진행하였다. 1724년(영조 즉위년) 경종의 의릉을 조성하는 과정과 절차는 『[경종의릉]산릉도감의궤』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의궤의 앞부분에는 간략하게 그린 능의 모형과 채색으로 된 사신도(四神圖)가 있으며 이어 문서 목록이 나온다.

선의왕후, 경종의 곁에 묻히다


경종의 왕릉을 조성한 지 6년 만에 경종의 계비인 선의왕후(宣懿王后:1705~1730) 어씨가 1730년 6월 29일 경덕궁 어조당(魚藻堂)에서 26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빈전(殯殿)은 광명전(光明殿)에 설치되었으며, 이조에서 빈전, 국장, 산릉의 3도감(三都監)에 당상(堂上) 및 낭청(郞廳) 각 8명을 배치하였다. 선의왕후의 국장을 준비하는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무더운 날씨였다. 영조는 염습하기도 전에 시신에 부기(浮氣)가 있음을 걱정하며, 소렴(小殮)을 앞당겨 행하라고 지시하였다. 


7월 4일에 총호사 이집 등이 여러 지사(地師)를 거느리고 산을 보기 위하여 나갔고, 산릉을 경종의 의릉 하혈(下穴)에 정하였다. 왕의 무덤 옆에 왕비의 능을 조성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아마도 옆자리에 조성하기가 어려워 그 아래쪽에 선의왕후의 능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효종과 인선왕후를 모신 영릉(寧陵)도 왕과 왕비의 능을 한 언덕의 상하에 조성하는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조선 왕릉 중 동원상하릉인 사례는 효종의 영릉과 경종의 의릉 2기가 있다. 


선의왕후 왕릉 조성에서 특별한 점이 있다면, 무덤에 『예기(禮記)』와 『시경(詩經)』을 넣었다는 것이다. 이 책들은 왕비의 친정집에서 보낸 것이었다. 선의왕후는 『예기』 내칙편(內則篇)과 『시경』 후비편(后妃篇)을 늘 책상에 올려놓고 보았으며, 본인이 세상을 떠나면 무덤에 묻어달라고 부탁하여 이를 따른 것이었다. 남편 경종에게 받았던 연갑(硯匣)도 함께 묻었음이 『영조실록』의 기록에 보인다. 


10월 19일에 선의왕후를 의릉에 장사지냈으며, 공역을 마무리 한 뒤에는 도감에 상을 내렸다. 11월 10일에는 영조가 친히 의릉에 나아가 경종과 선의왕후의 능을 차례로 살펴보았다. 이때 영조는 양주(楊州)의 백성들이 새 능역(陵役)을 전적으로 담당하고 있으니, 그것을 위로할 방안이 있는지 신하들에게 물었다. 그리고 이전에도 결역(結役:토지에 대한 부가세의 일종)을 면제해 일을 근거로 들어 양주 백성들의 결역을 면제해 주도록 하였다. 선의왕후의 능 자리를 경종 의릉의 동원(同原) 아래에 조성하였던 과정을 기록한 자료로는 『[선의왕후]산릉도감의궤』가 있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중앙정보부 강당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중앙정보부 강당

의릉과 중앙정보부


1962년 의릉 경역 안에 국가 기관이 들어섰다. 바로 당시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소문이 들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중앙정보부이다. 남산에 있는 중앙정보부 청사 이외에 필요한 청사를 이곳 의릉 인에 조성했던 것이다. 왕릉 영역이라 비밀스러운 곳이라는 장점 또한 청사 선정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중앙정보부는 의릉의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연못을 만드는 등 심하게 의릉 지역을 훼손했다. 1996년 중앙정보부가 강남구 내곡동으로 이전한 후에는 연못을 없애고 금천교를 복원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고 일반인들에게 공개를 했다. 중앙정보부 청사 자리는 한국예슬종합학교 건물에 포함되어 있는데,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선정릉이라는 지하철 이름 때문에, 태릉 선수촌의 명성 때문에, 성북구 정릉동이라는 동네 이름 때문에라도 서울 도심 속 조선 왕릉은 그 주인공들이 많이 알려지고 있다. 주인공 경종과 함께 여전히 그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의릉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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