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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조선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 드라마처럼 낭만적이었을까?

  • 등록일 2022-08-03
  • 작성자 관리자
신병주 교수
강학공간인 명륜당과 은행나무, 그리고 성균관 유생의 복식인 청금복을 입은 학생들
강학공간인 명륜당과 은행나무, 그리고 성균관 유생의 복식인 청금복을 입은 학생들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에 자리를 잡은 성균관 대학교 구내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건물이 보인다. 바로 1998년에 건립한 600주년 기념관이다. 100년의 역사를 가진 대학교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성균관 대학교는 왜 600주년을 강조하는 것일까? 조선시대 한양으로 성균관을 옮긴 것이 1398년이고, 이때부터를 성균관 대학교의 역사로 본 것이다.

성균관, 개경에서 한양으로


우리 역사에서 최고 교육 기관의 명칭으로 ‘성균(成均)’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1298년(충렬왕 24)에 국자감을 개칭한 국학을 성균감(成均監)이라 개칭한 데서 비롯된다. 그 뒤 1308년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성균감을 성균관이라 개칭하였다. 공민왕 때인 1356년(공민왕 5)에 관제의 복구로 국자감으로 환원시켰다가, 1362년 다시 성균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현재에 이른다. 공민왕 때는 신진사대부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성균관의 기능이 강화되었는데, 이색,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등이 이곳 출신이었다.


성균관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것은 고려후기였으므로 성균관도 당연히 수도인 개경에 있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고, 1394년에 한양 천도가 단행되면서, 성균관도 자연스럽게 수도로 옮겨졌다. 1395년부터 3년여의 공사 끝에 1398년 현재의 종로구 명륜동에 조선의 성균관이 위치하게 되었다.

공자와 유학자의 위패가 모셔진 대성전
공자와 유학자의 위패가 모셔진 대성전

가장 중심이 된 건물은 공자를 모시는 사당인 대성전(大成殿)과 성현을 모신 동무(東?), 서무(西?)였으며, 학생들의 강학 공간인 명륜당(明倫堂)과 기숙사에 해당하는 동재(東齋), 서재(西齋)가 있었다. 성균관의 중요한 시정(時政)을 기록하던 정록소(正錄所)는 현재의 대학교 행정실에 해당하고, 식당, 약방, 재정의 출납을 맡은 양현고(養賢庫) 등의 건물도 갖추어졌다. 


성종 때에는 도서관인 존경각(尊經閣)과 반궁제(泮宮制)의 필수적인 요소인 반수(泮水)가 설치되었다. 중종 때인 1544년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던 윤탁이 심했다고 전해지는 명륜당 앞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무엇보다 성균관의 역사가 유구함을 잘 입증하고 있다.


인재 양성을 위한 최고학부는 중국 주대(周代)에 천자의 도읍에 설립한 벽옹(?雍)과 제후(諸侯)의 도읍에 설립한 반궁(泮宮)의 제도에서 기원하여, 성균관에도 반수를 설치한 것이다. 벽옹은 둥근 연못, 반수는 반원의 연못이다. 성균관 주변을 반촌(泮村)이라 하거나, 반촌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반민(泮民)이라 칭한 것도 성균관의 반수에서 유래한다. 반촌은 조선시대의 대학촌으로 시험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당시 유생들의 해방구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오늘날의 대학로가 그 명맥을 잇고 있다. 


반민의 기원은 고려 말 안향이 개경 성균관에 기부한 노비들이라고 하며 조선 개창 후 태조가 성균관을 한양으로 이전할 때 그들의 후예들도 한양으로 함께 이주하면서 반촌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개국초에는 150인이었으나, 1429년(세종 11)에는 200인으로 증원되었다. 이 중 반은 상재생(上齋生) 또는 상사생(上舍生)이라 하여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로서 입학한 정규 학생이었으며, 나머지 반은 기재생(寄齋生) 또는 하재생(下齋生)이라 하였는데, 대부분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선발된 자들로, 부친이나 조부 찬스를 쓴 사람들이었다.

성균관 유생들의 삶과 꿈


2010년 성균관 유생들의 삶과 우정, 정치적 야망을 다룬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이 방송되었다. 조선시대 성균관의 구체적인 생활상과 함께 이곳에 들어간 유생의 개성 넘치는 모습이 펼쳐졌고, 이들의 삶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성균관 유생의 모습은 드라마에 비친 모습 그대로일까? 드라마는 남장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 만큼 묘한 사랑이야기가 중심을 이루면서 매우 발랄하고 역동적인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실제 조선시대 성균관은 그처럼 낭만적인 곳은 아니었다. 과거의 1차 시험에 해당하는 소과(생진과)에 합격한 생원과 진사가 들어와 관리로 나아가는 최종 관문인 문과 시험을 준비하는 곳이었다. 드라마만큼 낭만적이지는 않았을 것이고 치열한 고시 경쟁이 기다리는 살벌한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경국대전』에는 성균관 입학생의 자격이 규정되어 있다. 과거 1차 시험인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자, 서울의 사학(四學) 생도 중 15세 이상 소학 및 사서와 오경 중 1경에 통한 자를 성균관에서 수학하게 했다. 특별 전형도 있었다. 공신과 3품 이상 관리의 적자로서 ‘소학’에 통한 자나 관리 중 입학을 원하는 자를 일부 선발했다. 유생의 정원은 건국 초에 150명이었으나 세종 때 200명으로 늘었다. ‘신래희(新來戱)’라는 신고식도 있었다. 먼저 들어온 유생이 신입을 골탕 먹이는 의식이었지만 성균관 생활에 빨리 적응시키려는 뜻도 있었다. 


유생은 기숙사에 해당하는 동재와 서재에 거주했다. 학생회에 해당하는 재회(齋會)가 있었고 학생회장인 장의(掌議)를 뽑았다. 유생은 음식과 학용품 등 생활용품을 지급 받는 국비 유학생이었고 자부심도 컸다. 『논어』 등의 유교 경전을 비롯하여 『근사록』, 『성리대전』, 『경국대전』, 『통감』 등 과거 시험 과목과 문장력을 기르는 공부를 주로 했다. 현재의 쪽지시험이나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에 해당하는 일강(日講), 순과(旬課), 월강(月講)은 유생을 긴장하게 했다. 시험 성적은 통(通), 약(略,) 조(粗), 불(不)의 4단계로 나누었는데 요즈음의 A, B, C, F 학점과 유사하다. 


출석도 중시했다. 약방(藥房)에 단 북을 한 번 치면 잠을 깨고, 두 번 치면 세수, 세 번 치면 식당에 갔다. 군대의 단체 생활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유생들은 아침, 저녁 식사 때마다 식당에 비치된 명부인 도기(到記)에 서명을 하고 서명을 하면 원점(圓點) 1점을 얻었다. 원칙적으로 원점 300점을 취득한 자에게 관시(館試·성균관 유생만이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을 준 문과 초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원점은 영조 때 이르면 50점으로 완화됐다. 빡빡한 생활 가운데 휴식도 있었다. 매월 8일, 23일은 정기휴일로 세탁을 하거나 부모를 찾았다. 일부는 성균관 인근의 대학촌인 반촌에서 공부와 시험에 지친 스트레스를 풀었다.

관직 진출이 곧 졸업


성균관에서의 졸업은 문과 시험의 합격을 의미했다. 식년시의 경우 3년마다 한 번 시험을 치니까 실패하면 3년을 기다려야 했다. 왕이 성균관을 방문해 문묘에 참배할 때 치는 시험인 알성시나 제주도에서 올라온 감귤을 하사받을 때 실시하는 황감제(黃柑製) 등 특별 시험도 있었으나 선발 인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 16세기의 개혁파 학자 조광조는 중종이 성균관을 방문했을 때 실시한 알성시(謁聖試)에서 왕을 사로잡는 답안을 제출하여 초고속 승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연산군의 폭정으로 한때 연락(宴樂)의 장소가 되었던 성균관은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601년에 성균관 중건 공사가 시작되어 1606년까지 대성전, 동무, 서무와 명륜당 등의 건물이 다시 세워졌고, 1626년(인조 4)에는 존경각, 식당, 양현고 등의 건물도 중건되었다. 

대사례도(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대사례도(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영조는 1743년 영조는 신하들과 함께 활쏘기 시범을 보이는 대사례(大射禮)를 성균관에서 실시했다. 대사례 실시 후에는 육일각(六一閣)을 설치하여 대사례에 사용하던 궁시(弓矢), 웅후(熊侯:곰 과녁), 미후(?侯:사슴 과녁) 등을 보관하도록 했다. 활쏘기는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의 육예(六藝) 중의 하나라 하여 이름을 ‘육일각’이라고 한 것이다. 육일각은 명륜당의 동북쪽에 위치한 남향의 두 칸 건물이다. 영조는 당쟁의 종식을 선언하는 탕평책을 실시하면서 탕평비를 성균관에 세웠다. 역대 왕세자의 입학식도 성균관에서 있었다. 성균관에 원자학궁(元子學宮)을 지었으며 왕세자가 8세가 되면 입학시켜 성균관의 위상을 높였다. 


조선의 최고 시험인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하는 일은 성균관 유생들의 최고 목표였다. 과학화 정보화의 수준만 다를 뿐이지 그들의 고민과 꿈 또한 오늘날 대학생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인재들을 체계적으로 양성하려는 조선왕조의 의지는 성균관이라는 교육 기관으로 구현되었고, 이곳에서 배출된 유생들의 활약은 왕조의 기대와 의지를 충족시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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