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거리는 새 책이 아니다. 손때도 묻고 가끔 낙서도 보인다. 서울시 헌책방 '서울책보고'에 가면 문득문득 추억 속 책을 발견하고 그 시절 나를 만나게 된다. 가을의 길목에서 나만의 설레는 감성을 느끼기에 시(詩)만한 게 또 있을까. 지난 8월 30일부터 <절판 시집의 추억>전(展)이 열리고 있는 서울책보고를 찾았다.
한 손 거친 책이
한 손 만나 살아나고
한 손 닿아 피어나니
이 헌책이란 하늘바다 숨결
'서울책보고' 외벽에 있는 <헌책집> 시 일부
2호선 잠실나루역 바로 길 건너에 자리한 서울책보고는 평일엔 오전 11시에 문을 연다. 개장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더니 서점 앞에 긴 줄이 서 있다. 인근 종합병원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줄이다. 셔틀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찬찬히 서울책보고 외벽의 시들을 훑어 읽는다. 흑백사진 속 아이들도 지금은 이들의 나이가 되어 있겠지.
서울책보고에 들어서니 어디선가에서 기분 좋은 향이 날아들었다. ‘오래된 책 내음인가?’ 눈을 돌리니 예상치 못한 커다란 꽃들이 반겨 주었다. 코끝을 자극하는 향기와 귀를 간질이는 차분한 음악을 들으며 전시 코너로 걸음을 옮겼다.
<절판 시집의 추억> 특별 전시
서울책보고에서는 8월 30일부터 절판된 시집 특별전시가 열리고 있다. 절판된 시집이라니 까마득히 먼 추억을 찾아나서는 길 같다. 서울책보고는 1970~1990년대 시집을 수집하거나 절판된 시집을 찾는 이들, 수중에 없는 자신의 시집을 찾는 시인까지 옛 시집을 찾는 이들을 위한 유일한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에선 문학과지성사, 창비, 민음사 등 출판사들이 펴낸, 지금은 절판된 200여 권의 시집이 전시, 판매 중이다. 이중현의 교육시집 <아침 교실에서>, 채희문의 영화 시집 <추억 만나기> 등 1980~90년대 감수성을 느낄 수 있는 이색 시집 코너도 마련됐고 1980년대 대학 내 동인에서 펴낸 동인지도 만날 수 있다.
전시장 한 켠에는 헌책방들이 선별한 1970~2000년대 초판 시집과 김광규, 나희덕 등 시인 사인본도 전시 중이다. 고전 시를 필사하거나 전시된 시집 중 마음에 드는 시를 필사 노트에 담아 또 다른 추억을 만들 수도 있다.
전시는 기대 이상으로 알차고 많은 정성이 엿보였다. 시집들은 저마다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디자인된 김명순, 윤동주, 랭보, 에밀리 디킨슨 등 시인들의 띠지로 감겨 있다.
새 옷 마냥 새 띠를 두른 시집들은 원래 가격 그대로 3,000~4,000원이면 구매할 수 있다. 시집을 구매하면 특별히 제작된 레트로 종이봉투에 담아준다. 정말 헌책방만이 가능한 특별한 행사가 아닐까.
전시를 감상하다 보니 시민들이 추천하는 시민 큐레이터 코너부터 헌책을 서로 교환하는 북크로싱 ‘책보리’ 코너, 여기에 더해 매력적인 표지로 마음을 설레게 하는 독립출판 서적들이 하나둘 눈길을 끈다. 수많은 책들이 끊임없이 손을 내미는 기분이 들었다. 서울책보고는 머물고 또 머물고 싶은 공간이다.
9월 1일부터 '디지털책방' 오픈
전시장 옆으로는 ‘디지털책방’ 준비가 한창이다. 9월 1일부터 서비스를 시작했다. 지금은 종이책만큼이나 친숙한 전자책. 1971년 그 시작부터 코로나 시대를 지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화의 흐름을 한눈에 보여 준다.
디지털책방에 서서 헤드셋을 끼고 전자책을 읽거나 오디오북도 들을 수 있다. 책 읽어 주는 고양이에 원하는 디지털 카드북을 넣어보는 체험도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다. ‘독서 편식 없는 다양한 책 읽기를 권한다’는 서울책보고의 디지털 도전이 기대된다.
12만 권의 중고서적 숲 산책하며 힐링의 시간
서울책보고 하면 떠오르는 ‘책벌레’ 철제 원형서재도 둘러봤다. 카운터 옆 도서검색대에서 책을 검색하니 지정 번호가 아니라 헌책방 이름이 나온다. 12만 권이 넘는 책들이 헌책방별로 분류돼 있다. 숨바꼭질하듯 느긋하게 책 숲을 산책하다 보면 얻어걸리는 책이 더 많다. 시간을 들여 책을 고르는 일 그 자체가 힐링이 된다.
벽면 끝엔 만화책이 장식된 이색 포토 존 ‘짱구만화’도 있다. 안을 들여다보니 어린시절 집집마다 장식장을 채웠던 못난이 삼형제 인형이 반갑다. 챔프 시리즈를 손꼽아 기다렸던 그때가 생각나 웃음이 났다.
서울책보고에서 시집을 뒤적이며 나만의 설레는 가을 하루를 보냈다. 추억 여행을 기념하며 3권의 책을 구입했다. 전부 다 해도 1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책을 구입하지 않아도 QR 코드에 접속해 간단한 설문조사를 하면 가죽 책갈피를 준다. 가을 감성을 풍성하게 채워 줄 절판 시집의 추억전(展)은 오는 10월 16일까지 열린다.
서울책보고는 2019년 3월 신천유수지 내에 있었던 물류 창고를 도시 재생 프로젝트를 통해서 새롭게 조성한 문화공간이다. 지하철 잠실나루역에서도 도보로 1~2분이면 갈 수 있고 차를 가져갈 경우 신천유수지 공영주차장을 이용할 수도 있다. 서울책보고 옆으로는 한강공원이 이어진다. 서울책보고에서 시집 전시를 보고 한두 권 구입해 공원에서 시를 읽으며 가을을 만끽해보는 건 어떨까.
서울책보고
○ 위치: 서울시 송파구 오금로 1
○ 교통: 지하철 2호선 잠실나루역 1번 출구에서 도보 약 608m
○ 이용시간: 화~금요일 11:00~20:00 / 주말 및 공휴일 10:00~20:00
○ 휴관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및 추석 연휴
○ 홈페이지
○ <절판 시집의 추억>전(展): 2022. 8. 30.(화) ~ 10. 16.(일)
○ 문의: 02-6951-4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