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경교명승첩> 중 ‘목멱조돈’. 남산의 일출 장면 (소장처: 간송미술관)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33) 영조와 정선, 그리고 한강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謙齋) 정선(1676~1759)은 금강산과 관동팔경은 물론이고 서울의 풍경들을 화폭에 담았다. 비해당(匪懈堂), 수성동(水聲洞), 청풍계(淸風溪), 필운대(弼雲臺), 세검정(洗劍亭) 등의 그림을 통해, 18세기 중, 후반 백악산과 인왕산 주변의 서울 모습을 그대로 접할 수가 있다. 특히 이들 그림에 표현된 상당수의 풍경들은 현재에도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서 더욱 의미가 크다.
정선의 진경산수화 탄생에 영조(1694~1776, 재위 1724~1776)의 역할도 빠질 수 없다. 영조는 정선을 총애하여 양천 현령으로 임명하였는데, 정선은 양천 현령으로 있으면서 서울의 상징 한강의 모습들도 그림으로 남겼다.
1. 영조, 정선을 후원하다.
조선의 왕 중 가장 오랜 기간을 재위한 영조는 정치, 경제, 국방 분야에도 많은 업적을 남기는 한편, 문화와 예술 분야에도 큰 역량을 발휘해 나갔다. 『속대전』, 『속오례의』, 『여지도서』의 완성이 영조 대에 이루어졌고, 정선과 같은 예술가도 적극 후원하였다.
영조는 정선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꼭 호인 ‘겸재’를 부를 정도로 그 재능을 아끼고 존중했다고 한다. 정선에 대한 영조의 총애는 그를 지방관으로 임명한 데서도 잘 나타나 있다. 1733년 영조는 58세의 정선을 경상도에서 가장 경치가 좋다는 청하(淸河)의 현감으로 임명했다. 청하 현감 시절 정선은 관동팔경 등 동해안의 명승지를 그림으로 담았고, 경상도 명승지도 두루 돌아다니면서, 『영남첩(嶺南帖)』을 완성했다.
정선은 청하 현감 재임 중 모친상을 당해 관직을 그만두었는데, 영조는 1740년 다시 그를 불렀다. 그리고 현재는 서울에 편입되어 있는 경기도의 양천(陽川) 현령에 임명하였다. 2009년 서울 강서구 양천로에 겸재 정선미술관이 건립된 것도 정선이 1740년부터 5년간 양천현령으로 있었던 인연과 깊은 관련이 있다. 양천 현령에 임명된 후 정선은 서울의 명승들과 한강 주변의 풍경들을 화폭에 담았는데, 이것이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이다.
문화와 예술에 안목을 갖춘 영조의 후원이 있었기에 정선은 안정된 생활 속에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고, 정선은 명작으로 화답을 한 것이다. 제목 그대로 서울과 주변의 명승을 담은 『경교명승첩』에는 한강을 중심으로 한 한양의 주변 지역의 모습이 담겨 있다. 한강 중에서도 서울 주변의 한강을 일컬어 ‘경강(京江)’이라 불렀는데, 조선후기에는 광진에서 양화진까지의 강줄기를 경강이라 하였다. 경강은 도성 안의 시장에 미곡, 목재, 어물, 소금 등을 공급하면서 유통망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경교’에는 경강 교외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데, 『경교명승첩』은 현재의 양수리 부근에 있는 녹운탄(綠雲灘)과 독백탄(獨栢灘)에서 시작하여, 경강에서 행주산성까지 이르는 한강과 주변 명승지 30여 점을 그림으로 담고 있다. 그림을 따라가면 마치 배를 타고 한강을 여행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영조의 후원과 정선의 천재적 자질이 어우러져 탄생한 『경교명승첩』에 나타난 280년 전 한강의 풍경 안으로 들어가 보자.
정선 <경교명승첩> 중 ‘미호’. 현재의 미사리 부근.
2. 정선의 붓끝에서 탄생한 한강의 모습들
정선이 경교명승첩을 그린 배경에는 정선의 벗 사천 이병연(李秉淵:1671~1751)도 있었다. 정선은 65세 때인 1740년 양천 현령으로 부임하면서, 이병연이 시를 지어 보내면 자신은 그림을 그려 화첩(畵帖)을 만들자는 제안을 하였다. 즉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시와 그림을 서로 바꾸어서 봄)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들의 우정은 1741년 『경교명승첩』 2권으로 완성을 보았다. 이 화첩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컸던지 정선은 “천금을 준다고 해도 남에게 전하지 말라(千金勿傳)”는 인장(印章)까지 남겨 두었다.
『경교명승첩』은 한강 상류의 절경을 담은 『녹운탄』과 『독백탄』에서 시작한다. ‘탄’은 ‘여울’이란 뜻으로, ‘녹색 구름이 이는 여울’인 녹운탄은 현재의 경기도 남종면 수청리 부근으로 추정된다. 독백탄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양수리 부근의 여울이다. 『독백탄』에서는 훗날 정약용이 자주 찾은 운길산과 수종사가 눈에 들어온다.
현재의 미사리 부근인 『미호(美湖)』는 특별히 2점을 남겼다. 미호에 위치한 석실서원(石室書院)은 안동 김씨 김상용을 배향한 서원인데, 정선은 이들의 후손인 김창협, 김창흡 등의 후원을 받은 만큼 석실서원에 대한 감회가 매우 컸을 것이다.
양수리 부근에서 시작한 그림은 현재의 서울 중심으로 향한다. 『압구정(狎鷗亭)』은 세조 대에서 성종 대까지 최고의 권력가 한명회의 별장을 그린 것이다. 왕실만이 한강 변에 별장을 세우던 시기에, 한명회가 이곳에 압구정을 세운 것은 그의 권력을 상징하고 있다. 그림의 중앙부 우뚝 솟은 바위 위에 압구정이 위치하고, 백사장이 길게 뻗어 나온 모습이나 돛단배들이 정박해 있는 모습은 최고급 아파트가 들어선 현재와는 너무나 다른 평화로운 풍경들이다.
『광진(廣津)』과 『송파진(松坡津)』, 『동작진(銅雀津)』, 『양화환도(楊花喚渡)』 등의 그림들은 18세기에 이 지역이 포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포구의 위치에는 현재에는 광진교, 동작대교, 양화대교 등 주요 다리가 있는 것도 흥미롭다. 그만큼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한 공간의 모습은 현재에도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정선 <경교명승첩> 중 ‘동작진’
『동작진』에는 18척의 많은 배가 그림에 등장하며 바다와 강을 왕래하는 쌍돛대를 단 배도 등장하고 있다. 물화(物貨)의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지던 한강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동작진』의 그림 왼쪽으로 넓게 펼쳐진 숲은 현재의 반포 일대이며, 나귀를 타고 나루를 건너려는 선비 일행의 모습도 보인다.
남산의 풍광을 그린 『목멱조돈(木覓朝暾)』은 이병연이 보내온 ‘새벽빛 한강에 떠오르니, 언덕들 낚싯배에 가린다. 아침마다 나와서 우뚝 앉으면, 첫 햇살 남산에 떠오른다.’는 시에 맞추어 남산에 떠오른 일출의 장관을 그린 것이다. 남산의 봉우리 중턱에 해가 반쯤 솟아오르면서 붉은빛이 동쪽 하늘에 가득하고, 노을빛이 한강에 반사가 되는 모습이다. 남산의 봉우리가 두 개인 것도 선명하게 나타나며, 어부들이 고깃배를 몰고 오는 모습은 그림의 우측 하단에 등장한다.
『행호관어(杏湖觀漁)』에는 고깃배가 등장하는 점이 흥미롭다. ‘행호’는 지금의 행주산성 앞 한강으로 이 일대에 많은 고기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한강의 명물이었던 웅어는 바닷물과 민물이 합류하는 곳에 살았으며, 웅어는 그 맛이 뛰어나 왕에게 진상하는 물품으로 사용되었다. 『행호관어』에는 웅어가 뛰어놀았던 한강의 운치가 느껴진다.
『소악후월(小岳候月)』은 양천 관아의 궁산 기슭에 세워진 정자 소악루에 올라 한강을 조망하여 그린 그림으로, 어둠이 내린 절벽이 한강에 잠겨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강서구 궁산의 ‘소악루’. 정선은 이곳에 올라 한강을 조망하며 '소악후월'을 그렸다.
영조 시대 문화 분야에서 또 하나 두드러진 양상은 중인(中人)들의 위항문학(委巷文學) 운동이 본격화된 것이다. 중인들의 공동시문집인 『소대풍요(昭代風謠)』가 1737년(영조 13)에 간행된 것도 영조 시대의 문화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중인 문화의 중심 공간이 정선이 주요 활동 무대로 삼았던 인왕산 일대의 송석원, 필운대 지역이었다는 점도 주목이 된다.
정선은 조선후기 학술과 문화의 진흥이 본격화되던 영조 시대에 왕의 후원을 직접 받으면서 자신이 보고 감상한 있는 그대로의 경치들을 화폭으로 담았다. 영조가 정선을 양천현령으로 임명한 것은 서울 화가였던 그의 능력에 날개를 달아 주었고, 한강의 여러 공간들이 잘 조화된 풍경화처럼 각각 되살아났다. 최근 서울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로 떠오르고 있는 한강의 세빛섬. 세빛섬에 한강을 배경으로 한 정선의 그림들을 다시 볼 수 있게 하는 장치들을 조성해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