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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인듯 디테일 생생! 영조와 정순왕후 혼례식 담은 '의궤'

  • 등록일 2022-08-17
  • 작성자 관리자

영조가 정순왕후를 계비로 맞이하는 혼례식을 기록한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에 수록된 반차도

영조가 정순왕후를 계비로 맞이하는 혼례식을 기록한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에 수록된 반차도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30) 영조와 정순왕후 혼례식 풍경


1759년(영조 35) 음력 6월, 한여름의 무더위가 지금 못지않은 시기에 66세의 국왕 영조(1694~1776, 재위 1725~1776)는 15세의 신부 정순왕후(1745~1805)를 계비로 맞이하는 혼례식을 거행하였다. 왕과 왕비의 나이 차 51세는 조선 왕실의 최고 기록이기도 했다. 두 사람의 혼례식은 『영조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로 정리되었고, 의궤에는 당시 혼례식의 현장 모습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영조정순왕후 가례도감 의궤 보기 ☞ 클릭(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


혼례식의 첫 관문, 간택


조선시대 왕실 행사 중 가장 축제적 성격이 컸던 것으로는 혼례식을 꼽을 수 있다. 왕과 왕세자, 왕세손 등 지위에 따라 격을 달리하는 혼례식이 이루어졌고, 시대별로 혼례식 내용에는 조금씩 변화가 있었다. 조선시대 왕실의 혼례는 ‘가례(嘉禮)’로 칭해졌다. 원래 가례는 국가의 경사가 될 만한 행사를 뜻하는 개념이었다. 조선전기 국가의례를 집대성한 『국조오례의』에도 가례(嘉禮)는 길례(吉禮), 흉례(凶禮), 빈례(賓禮), 군례(軍禮)와 함께 오례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왕실 행사의 전 과정을 기록과 그림으로 정리한 의궤(儀軌)에서 모든 혼례식을 가례라 표현한 것에 나타나듯, 혼례 의식만을 가례라 칭하게 되었다. 


왕비를 간택하는 과정은 혼례식의 첫 번째 관문이었다. 왕실에서는 간택을 위해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고 적령기에 있는 팔도의 모든 처녀를 대상으로 처녀단자(處女單子)를 올리게 했다. 처녀들의 나이는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으나 대개 10대 초, 중반이었다.


『세종실록』에는 세자빈 간택을 위해 13세 이하 처녀들에게 혼인을 금한 기록이 있고, 『세조실록』에는 ‘왕세자빈의 간택을 위해 14세 이하 처녀의 혼가를 금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영조의 계비 간택 때는 신부의 금혼 범위를 16세에서 20세로 하였다. 처녀단자에는 첫 줄에 처녀의 생년월일을 적었고, 둘째 줄에는 간택 대상자의 사조(四祖, 부·조부·증조부·외조부)를 적었다. 


왕실의 혼사여서 많은 처녀들이 단자를 올릴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처녀단자를 올리는 응모자는 대개 25~30명 정도에 불과했다. 간택은 형식상의 절차였을 뿐 실제 규수가 내정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간택에 참여하는데 큰 부담이 따랐기 때문이었다. 간택의 대상이 된 규수는 의복이나 가마를 갖추어야 하는 등 간택 준비 비용이 만만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간택이 되더라도 정치적 부담이 수반되었다. 


간택에 참가한 처녀들은 같은 조건에서 후보를 고른다는 취지에서 똑같은 복장을 입었다. 초간택시의 복장은 노랑저고리에 삼회장을 달고 다홍치마를 입었다. 재간택, 삼간택으로 올라갈수록 옷에 치장하는 장식품은 조금씩 늘었다. 삼간택에서 최종적으로 뽑힌 처녀가 부인궁(夫人宮)으로 나갈 때 입는 옷은 대례복으로 거의 왕비의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간택 심사 참여한 왕실 가족들은 발을 치고 후보자를 지켜보았고, 세밀한 심사는 경험이 많은 상궁들이 맡았다고 한다. 심사가 끝난 후에는 간단한 점심 식사, 곧 주반(晝飯, 낮것)을 제공하여 후보자들의 허기를 채우게 하는 한편, 식사 예절도 주의 깊게 관찰하였다.


간택과 정순왕후의 지혜


『영조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의 기록에 의하면, 6월 2일 초간택에서 6명을 뽑고, 2차 심사에 해당하는 재간택에 들어갔다. 재간택에는 김한구, 김노, 윤득행의 딸이 선발되었고, 6월 9일의 삼간택에서 김한구의 딸인 정순왕후가 최종 후보로 선발되었음이 나타난다. 간택은 창경궁 통명전에서 거행되었다. 통명전은 성종 대인 1484년에 설치되어 왕비 처소로 활용이 된 곳이다. 왕실의 잔치도 이곳에서 자주 열렸다. 통명전은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난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죽은 쥐나 새와 같은 흉물을 묻은 곳이기도 했다.


통명전은 왕비가 생활하고 잠을 자는 전각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통명전은 왕비가 생활하고 잠을 자는 전각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1926년 강효석이 편찬한 『대동기문(大東奇聞)』이라는 책에는 정순왕후가 왕비 후보자로 뽑혀 국왕인 영조 앞에 섰을 때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먼저 정순왕후는 다른 후보자들과는 달리 방석을 치우고 자리에 앉았다. 영조가 그 이유를 묻자 방석에 부친 이름이 적혀 있기 때문이라 답하였다. 또 영조가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혹은 산이 깊다, 혹은 물이 깊다 하였지만, 정순왕후는 인심이 가장 깊다고 하였다. 영조가 그 이유를 묻자 ‘물건의 깊이는 가히 측량할 수 있지만 인심은 결코 그 깊이를 잴 수 없다’고 답하였다. 이어 영조가 꽃 중에는 어떤 것이 제일 좋으냐는 질문을 던졌다. 왕비 후보들은 저마다 복숭아꽃·매화꽃·모란꽃이라고 대답하였지만, 정순왕후만은 목화꽃이라고 답하면서, ‘다른 꽃들은 모두 일시적으로 좋은 것에 불과하지만, 오직 목면은 천하의 사람들을 따뜻하게 해주는 공이 있습니다.’라고 그 이유를 들었다. 


간택을 받을 당시 정순왕후는 속이 깊고 지혜로운 규수의 면모를 보여서 영조의 마음에 쏙 들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한편 『대동기문(大東奇聞)』이라는 책에는 정순왕후가 왕비 후보자로 뽑혀 국왕인 영조 앞에 섰을 때의 일화를 소에는 또한 정순왕후가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강한은 성격의 소유자였음을 소개하고 있다. 


“장차 입궁하려 할 때에 여관이 의복을 짓기 위해서 정순왕후에게 돌아서 앉아줄 것을 청하였다. 왕후가 정색을 하면서 말하기를, ‘네가 능히 돌아서 앉을 수는 없는가?’ 여관이 매우 황공해 하였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지혜로움 속에 내재했던 추상같은 면모. 이런 모습은 19세기 세도정치의 시기, 수렴청정을 하면서 신유박해의 중심에 있게 되는 대왕대비 정순왕후의 이미지로 재현하게 된다.


혼례식의 하이라이트, 친영(親迎)


왕실 혼례식의 하이라이트는 별궁에서 왕비 수업을 받고 있던 왕비를 궁궐에 모셔오는 의식인 친영(親迎) 행사였다. 별궁은 왕비로 간택된 규수가 미리 왕비 수업을 받게 하는 공간이자, 왕이 혼례식 때 친히 왕비를 맞이하러 가는 곳이었다. 요즈음으로 치면 별궁은 예식장과도 같은 기능을 한 곳이다. 조선시대 별궁으로 사용되었던 곳은 태평관, 어의궁, 운현궁이었고, 정순왕후 때의 별궁은 어의궁이었다. 어의궁은 효종이 왕이 되기 전에 거처했던 잠저로, 어의동별궁 또는 어의동 본궁이라고도 했다. 


『영조실록』에는 1759년(영조 35) 6월 22일 “임금이 어의궁에 나아가 친영례를 거행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어의궁 위치는 현재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위치한 효제초등학교 인근으로 보고 있다. 어의궁이 별궁으로 활용된 것은 창덕궁, 창경궁 등 궁궐과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1863년 고종과 명성황후의 혼례가 흥선대원군 사저였던 운현궁에서 거행되면서 어의궁을 혼례식장으로 활용한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어의궁에서 왕비 수업을 받고 있던 정순왕후를 영조가 창경궁으로 모셔오는 친영 행렬은 『영조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에 첨부된 50면의 친영 반차도(班次圖)에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의궤의 기록에 의하면 어가 행렬은 창경궁의 홍화문을 나와 이현 고개 앞을 지나 어의궁으로 가 친영 의식을 행하고, 종묘 앞 동구와 파자전 앞 석교(옛 단성사 부근)를 지나 창덕궁 돈화문으로 돌아왔다. 


반차도는 기본적으로 어가를 선도하는 행렬, 왕의 가마 행렬, 왕비 가마 행렬, 후미에서 호위하는 행렬로 구성되어 있다. 선도 행렬 뒤에는 문무백관과 군사지휘관 등 왕을 따르거나 호위하는 관리들의 모습이 나타나며, 이어서 화면의 가장 중심부를 이루는 왕의 가마와 왕비 가마 행렬이 등장한다. 


왕의 가마 앞에는 부연(副輦)이라는 예비가마를 배치하여 만약의 사고에 대비하였다. 왕의 가마는 개방형으로 제작하여 백성들이 왕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왕의 가마 뒤에는 악대인 후부고취(後部鼓吹) 10명, 사고에 대비한 어의(御醫)와 비서실장인 도승지가 등장하며, 이어서 승지 4명과 사관 4명이 말을 탄 자세로 나타난다. 사관 4명이 따르는 것은 이 행사를 꼼꼼하게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반차도, 왕비 책봉에 관계된 교명과 옥책을 실은 가마가 등장한다.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반차도, 왕비 책봉에 관계된 교명과 옥책을 실은 가마가 등장한다.


왕의 행렬 다음에 왕비 행렬이 등장한다, 왕비의 가마 앞에는 왕비의 책봉에 관계된 교명(敎命), 옥책(玉冊), 금보(金寶), 명복(命服) 등 상징물 실은 가마가 등장한다. 왕비의 가마는 사방을 닫아 왕비의 모습을 외부에서는 볼 수 없게 하였다. 왕비 가마 주변에는 왕비를 배종하는 궁녀들의 모습이 나타나며, 행렬의 마지막에는 후미에서 경호하는 후사대(後射隊)가 그려져 있다. 행사에 동원된 사람 1,118명이며, 말 390필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며, 어가 행렬을 돋보이게 하는 의장기와 의장물의 모습도 화려하다. 


반차도 제작에는 신윤복의 아버지인 신한평을 비롯하여, 김응한, 이필한, 현재항 등 18인의 화원이 참여하였음도 기록되어 있다. 왕실 혼례식의 화려함과 위엄이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나타난 친영 반차도를 통하여 1759년 6월에 거행된 영조와 정순왕후 혼례식 현장으로 초대받은 기분도 느낄 수가 있다.